선험기(宣驗記)
유의경이 쓰고 김장환이 옮긴 <<선험기(宣驗記)>>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낄 때
그는 왕족이었지만 전쟁과 친족 피살, 폐위와 음모의 현실에 진저리친다. 영원한 평안의 시간을 불교에서 찾은 유의경은 불법의 영험함을 세상에 전한다. 그것이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설득함으로써 스스로 상상의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앵무새가 다른 산으로 날아가 깃들였는데 그 산속의 날짐승과 들짐승이 앵무새를 매우 아껴 주었다. 앵무새는 스스로 생각하길, 비록 이곳이 즐겁기는 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곧 떠났다. 몇 달 뒤에 그 산속에서 큰불이 났는데, 앵무새가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곧장 물로 들어가 깃털을 물에 적셔 날아다니며 물을 뿌렸다. 이를 보고 천신이 말했다.
“너는 비록 뜻은 있지만 어찌 그것으로 충분하겠느냐!”
앵무새가 대답했다.
“비록 불을 끌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일찍이 제가 이 산에서 잠시 기거하는 동안 날짐승과 들짐승이 선을 베풀어 모두 형제가 되었기에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천신이 가상히 여기고 감동하여 즉시 불을 꺼 주었다.
≪선험기≫, 유의경 지음, 김장환 옮김, 28쪽
기특한 앵무새다. 어떤 이야기인가?
≪선험기(宣驗記)≫에 실린 이야기다. 비슷한 얘기가 ≪예문유취(藝文類聚)≫, ≪초학기(初學記)≫, ≪백공육첩(白孔六帖)≫, ≪태평어람(太平御覽)≫,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 등에도 있다. 앵무새 대신 꿩이 주인공인 버전도 있다.
≪선험기≫는 어떤 책이고 언제 나왔나?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 나온 불교류지괴소설집(佛敎類志怪小說集)이다. 지은이는 ≪세설신어(世說新語)≫와 ≪유명록(幽明錄)≫을 지은 유송(劉宋)의 유의경(劉義慶)이다.
1600년 전의 책인가?
원서는 13권이었으나 중간에 망실됐다. 다만 그 일문(佚文)이 여러 책에 흩어져 총 37조, 즉 37가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 일문을 모아 보면 ≪선험기≫의 대체적인 면모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유송(劉宋)’, ‘일문(佚文)’이란 무슨 말인가?
유송(劉宋)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때 유유(劉裕)가 진(晉)나라를 이어 세운 왕조를 말한다. 10세기에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와 구분하고자 ‘유송’이라고 부른다. 일문(佚文)이란 원문은 사라져 없어지고, 원문 중의 일부 문장이 다른 책에 수록되어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적잖은 고대 서적이 이런 형태로 전해 왔다. ≪선험기≫도 마찬가지다.
옛 기록은 ≪선험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선험기≫ 13권, 유의경 찬”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당나라 초기의 승려 법림(法琳)의 ≪파사론(破邪論)≫ 권하(卷下)와 도선(道宣)의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 권하에도 이 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나라 때까지는 이 책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본이 없어졌다면 일문이 관건인데, 일문 현황은?
당나라 및 송나라 때의 책인 ≪태평광기(太平廣記)≫·≪태평어람≫·≪변정론(辨正論)≫ 등에 일문이 남아 있다. 명나라 때 나온 ≪중편설부(重編說郛)≫, ≪오조소설(五朝小說)≫, ≪금낭소사(錦囊小史)≫ 등에도 일문이 있으나 내용이 빈약하다.
근대에 와서 루쉰(魯迅)이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이란 책을 내놨는데 여기에 ≪태평광기≫·≪태평어람≫·≪변정론≫에서 모은 35조의 일문을 실었다. 그 후로 ≪법원주림(法苑珠林)≫에서 일문 2조가 더 발견됐다. 이로써 현재까지 ≪선험기≫의 일문은 총 37조가 되는 셈이다.
‘유송’은 유씨 왕조라고 했는데 유의경도 왕족인가?
그렇다. 유의경은 당대의 문학가이자, 유송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유유의 조카다. 왕족으로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단양윤(丹陽尹)·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을 역임했다. 그는 ≪세설신어(世說新語)≫·≪유명록(幽明錄)≫·≪소설(小說)≫·≪서주선현전(徐州先賢傳)≫·≪강좌명사전(江左名士傳)≫·≪의경집(義慶集)≫·≪집림(集林)≫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세설신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망실되었다.
‘선험기’란 무슨 뜻인가?
‘영험함을 선양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영험함’이란 불법(佛法)의 영험함을 말한다. 남은 일문 37조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제목과 완전히 부합한다. ≪선험기≫를 ‘불교류지괴소설집’이라고 했는데, 이 말인즉슨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라는 뜻이다.
≪선험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는?
당나라 때 승려 도세(道世)는 ≪선험기≫ 등에 대해 “고금의 선악화복과 상서로운 징조를 폭넓게 기술했다”고 했다. 루쉰은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선험기≫ 같은 부류의 작품을 아울러 ‘불교의 포교를 돕는 책’이란 뜻의 “석씨보교지서(釋氏輔敎之書)”라고 하면서, “대개 불경과 불상이 드러낸 이적(異蹟)을 기술하고 영험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세속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신앙심을 일으키게 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위진남북조시대 불교의 위상은?
지식인들의 청담(淸談) 주제로서 ≪노자≫·≪장자≫·≪역경≫과 함께 불학(佛學)이 중시되었다. 더불어 대량의 불경이 번역되었다. 당시 많은 명사들이 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변적인 담론의 대상이었지 종교로 불교를 신봉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유의경과 불교의 관계는?
그는 불교를 신봉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생애를 살펴보면 추측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유의경은 13세 때 이미 백부 유유가 후진(後秦)의 요홍(姚泓)을 정벌하는 데 따라나선 바 있으며, 그 후 유송이 개국되는 과정에서 전쟁의 참상과 왕조 교체기의 혼란을 직접 겪었다. 유송 건국 이후에도 사촌인 유의진(劉義眞)의 피살, 소제(少帝) 유의부(劉義符)의 폐위 사건이 일어난다. 왕족으로서 현실정치에 몸담고 있던 그에게 이런 모진 시대환경은 결국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를 신봉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만년인 서기 440년 즈음에 ≪선험기≫가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 이야기’는 불교 고사인가?
≪선험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관세음보살의 영험함을 밝힌 고사’, ‘불경·불상·사리·이인(異人)의 영험함을 밝힌 고사’,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받은 고사’, ‘불법을 불경스럽게 대해 벌을 받은 고사’, ‘살생을 저질러 업보를 받은 고사’, ‘불경의 영향을 받은 고사’ 등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산불을 끈 앵무새>는 불경에서 나온 고사다. 삼국시대 때 승려인 강승회(康僧會)의 ≪구잡비유경≫에 실린 이야기를 재인용한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단조롭지 않은가?
≪선험기≫는 위진남북조 최초의 불교 선양 지괴소설집으로, 다양한 불법의 영험함을 기록하여 유의경 자신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드러냄과 동시에 불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심리상태를 반영했다. 한편 루쉰은 ≪선험기≫ 같은 “석씨보교지서”들을 가리켜 ‘제재의 선택이 단조롭고 창작성과 상상력이 다소 부족하여 문학작품으로서 예술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거의 대부분의 중국소설사에서도 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불교류지괴소설이 유행하게 된 당시의 사회적 내재요인은 무엇인가?
지괴소설로 표출된 시대의식의 일면을 읽어 내고자 할 때 “석씨보교지서”를 빼놓는다면, 당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문화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놓치게 된다. ≪선험기≫는 육조시대라는 복합적인 구조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 가운데 하나다.
당신의 이번 번역 작업에 루쉰은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루쉰이 모아 놓은 자료 덕분에 후대 연구자는 큰 도움을 얻는다. 이번 번역만 해도 그렇다. 1999년 베이징 인민문학출판사에서 낸 ≪루쉰집록고적총편(魯迅輯錄古籍叢編)≫ 수록 ≪고소설구침≫본 ≪선험기≫를 저본으로 삼았다. 여기에 추가로 발견된 2조를 부록으로 수록하여 총 37조 전체를 우리말로 옮기고 역주를 달았으며 원문을 함께 실었다. 사부(謝敷)의 ≪광세음응험기(光世音應驗記)≫도 함께 번역하여 수록했다.
≪광세음응험기≫는 무슨 책인데 이번에 소개한 것인가?
대략 3세기 이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관세음신앙’을 소개하고자 했다. 당시엔 ‘관세음’을 ‘광세음’이라고도 불렀다. ‘응험기’류 책은 관세음보살 고사만을 전문으로 다뤘으므로 불교류지괴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여타 지괴소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은 분명하다. ≪선험기≫와 좋은 비교가 되겠기에 일문 7개조를 번역하여 수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장환이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다. 중국 문언소설과 필기문헌 연구가 전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