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 사선
2477호 | 2015년 3월 5일 발행
류종목의 소동파 사선
류종목이 옮긴 소식(蘇軾)의 ≪소동파 사선(蘇東坡詞選)≫
시를 짓듯 사를 짓고
사는 대중가요였다.
통속이었고 볼 것이 없었다.
동파가 등장하자 사는 시의 반열에 선다.
지식인의 감정이 이것에 실려 서정의 시가 된다.
천재는 규범에 얽히지 않았다.
타고 놀았다.
人有悲歡離合 사람은 슬프다 기쁘고 헤어졌다 만나는 것
月有陰晴圓缺 달은 찼다 기울고 흐려졌다 개는 것
此事古難全 이 일은 예로부터 늘 좋을 수 없었으니
但願人長久 다만 하나 바라는 건 우리 오래 살아서
千里共嬋娟 천 리 밖에서나마 고운 달 함께 보는 것
<병진년 중추절에 자유를 생각하며>, ≪소동파 사선≫, 소식 지음, 류종목 옮김, 37~38쪽
소동파가 함께 하려는 그는 누구인가?
친동생이다. 소동파는 동생 소철과 우애가 깊었다. 자주 보려고 일부러 가까운 곳에 부임했지만 막상 명절이 되니 가깝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나?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이 유난히 깊었다. 지방관으로서 백성에 대한 연민도 깊었다.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도 그렇게 긍정적이었나?
아니다. 사실 소동파는 송대 정치적 핍박 속에서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일생 대부분을 폄적한 지방관 생활로 보냈다.
그의 작품도 폄적했다는 말인가?
작품에서는 달랐다. 자연을 사랑하고 세속의 가치에 초연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까지도 서슴없이 토로했다.
사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는가?
그는 사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담은 작품이기 때문에 제목이 필요했다.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소동파는 사에 제목을 붙이는 기풍을 만들었다.
과거의 사는 제목이 없었나?
그렇다. 곡조의 이름인 사패(詞牌)만 붙여도 작품의 이해에 별 문제가 없었다. 사는 일종의 대중가요 가사였다. 기존 곡조가 있었고, 여기에 맞추어서 사를 써넣었다.
소동파 사에는 제목과 사패가 따로 있는가?
그렇다. 예컨대 위에 인용한 사의 원래 제목은 <병진년 중추절에 새벽까지 흔쾌하게 마시고 크게 취하여 이것을 짓고 아울러 자유를 그린다(丙辰中秋, 歡飮達旦, 大醉, 作此篇, 兼懷子由)>이다. 번역본에서는 편의상 간략하게 줄였다. 그리고 사패는 ‘水調歌頭’다.
흔쾌하게 마시고 쓴 사는 여느 사와는 무엇이 다른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며 호방하다. 예전 사가 감상적이고 여성적이었던 것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소동파를 호방파(豪放派)의 비조라 부른다.
호방파는 무엇을 했는가?
사가 통속에 주저앉지 않고 지식인의 갖가지 감정을 담아내는 서정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문학사에서는 이러한 소동파의 작사 태도를 ‘이시위사(以詩爲詞)’라 했다. 시를 짓듯이 사를 지었다는 뜻이다.
시를 짓듯 사를 지으면 사는 어떻게 되나?
불가피하게 사의 음악적 측면을 경시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소동파가 호방파를 열어 사가 쇠퇴했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의 공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의 공적이 무엇인가?
사를 서정시의 대열에 올린 것이다. 사의 곡조가 없어진 지 오래인 오늘날까지도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사의 창작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소동파의 공로다. 그래서인지 이규보나 김부식 같은 고려 문인들도 소동파를 굉장히 추앙했다.
이 책 ≪소동파 사선≫은 어떻게 엮었나?
현존하는 350여 수의 작품 중 대표적인 것 64수를 선정해 역주했다. 이 작품만으로 소동파 사의 전모를 효율적으로 엿볼 수 있도록 작품들을 여섯 범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창작 시기순으로 배열했다.
옮기며 마음을 두었던 점은?
원작 내용을 충실하게 전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역문 자체가 한 편의 독립된 시가 될 수 있도록 글자 수, 압운 같은 운율도 최대한 고려했다. 4·4조 또는 7·5조를 기본으로 하였고 은유나 의인법도 가급적 유지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류종목이다.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