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
이봉지가 옮긴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의 ≪수녀(La Religieuse)≫
수녀 서원 취소 소송
약속을 지키면 죄인이 된다. 지키지 않으면 배신자가 된다. 길이 없다. 문제가 틀린 것이다. 정답은 약속의 취소다. 결론 없는 논쟁만 계속된다. 우리는 왜 약속했던 것일까?
“청빈의 서원을 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도둑이 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며, 정결의 서원을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현명한 법을 영원히 짓밟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바이며, 순종의 서약을 하는 것은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특권인 자유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서원을 지키면 하느님께 죄인이 되며, 지키지 않으면 맹세를 어기는 사람이 됩니다. 즉, 수도자는 광신자나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녀≫, 드니 디드로 지음, 이봉지 옮김, 147~148쪽
종교 서원의 모순을 이렇게 지적하는 놀라운 천재의 이름은 무엇인가?
≪수녀≫에 등장하는 변호사 마누리다. 변호사의 변론이지만 작가 디드로의 발언이다.
재판 중인가?
소송 의뢰인은 쉬잔 수녀다. 쉬잔은 ‘수녀 서원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서원 취소 소송을 제기한 수녀가 왜 수녀가 되었는가?
‘출생의 비밀’에 얽혀 반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갔다. ‘5000프랑의 돈이 걸린 일’이라 수도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당시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한다.
쉬잔의 실제 모델이 있는가?
마르그리트 들라마르 수녀다.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어머니에 의해 반강제로 수녀가 됐다. 서른다섯이 되던 1752년에 수녀 서원 취소 소송을 냈고 그 후 모녀 간 법정 공방이 되풀이됐다.
소송에서 이겼는가?
수녀원 탈출에 실패했다. 프랑스대혁명 이듬해인 1790년까지, 일흔셋의 나이로 수녀로 있었음이 확인된다. 혁명으로 종교시설 폐쇄령이 내린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다. 후대 연구는 그녀를 ‘사생아’로 추정한다.
디드로가 마르그리트 소송을 본 것인가?
소송은 장안의 화제였다. 디드로와 크루아마르 후작, 그리고 친구들도 관심이 컸다. 후작은 그 수녀를 잘 몰랐지만 그녀를 도우려 했고 1758년 소송이 원고 패소로 끝나자 캉에 있는 라송 성으로 돌아갔다.
끝난 이야기가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1760년 초, 디드로와 친구들이 후작을 다시 파리로 부르기 위해 장난을 친다. 가짜 편지를 보낸다.
가짜 편지의 전말은 무엇인가?
어느 수녀가 수녀원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여 파리 시내에 숨어 산다.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후작에게 보낸다. 이때부터 ‘가짜 수녀’와 후작 사이에 서신 왕래가 시작된다.
편지는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편지들과 사연은 ≪수녀≫ 후반부의 <전기 작품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디드로는 뭘 했나?
21년 뒤, 그는 예전에 쓴 ‘가짜 편지’ 원고를 본다. 내용을 대폭 개편해 장편 서간체 소설로 다듬는다. ‘가짜 편지’는 조금 손질해 ≪수녀≫의 부록 형태로 첨부했다.
≪수녀≫가 당대의 금서였고 지금도 규제받는 이유는 뭔가?
너무도 대담한 디드로의 사상 때문이다. ≪수녀≫는 종교계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비판의 칼은 극단적이다. 1966년 자크 리베트 감독이 만든 영화 ≪수녀≫ 역시 종교계 반발로 상영 금지 처분됐다.
디드로가 수녀 이야기를 쓴 이유는 뭔가?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에게 ‘강요된 종교 생활’은 주요 비판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디드로는 젊은 시절, 아버지에 의해 트루아 근처의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한 적이 있다. 그의 누이동생 앙젤리크는 수녀가 되었다가 정신 이상을 앓고는 감금 생활 끝에 요절했다.
계몽철학자에게 수도원이란 무엇인가?
디드로에게 수도원·수녀원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는 커다란 굴레다. 인간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간주하는 계몽철학자는 평생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와 관습에 대항했다.
디드로의 ‘수녀원 반대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인가?
변론 내용이 디드로의 진의다. 마누리는 ‘선정을 베푸는 국가라면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어렵고 나오는 것은 쉬워야 마땅하다. 형식상 조그만 하자만 있어도 무효인 법 절차가 많은 터에 유독 종교 서원만은 엄격한 법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묻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가해자 수녀는 어떻게 되는가?
제대로 단죄 받은 수녀는 없다. 디드로는 그들을 가해자로 보지 않는다. 희생자로 간주한다. 그들의 잔인성과 교활함, 일탈 행동은 개개인의 허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사람과 섞여 살고자 하는 인간 본성을 억압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인간을 세계로부터 격리 감금했을 때 생기는 필연의 결과다.
‘억지 수녀’가 없어진 오늘날, 이 책 ≪수녀≫의 의미는?
작품의 제재는 18세기 프랑스 사회 특유의 문제다. 현재는 현실적 당면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아직도 자유를 구속하는 다양한 제도가 있다. 제도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자유를 위해 항변하는 쉬잔의 절규는 여전히 절박하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봉지다. 배재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