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천줄읽기
김정아가 뽑아 옮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의 ≪악령(Бесы) 천줄읽기≫
모두 사랑하고 모두 굴복했으나
스타브로긴은 파멸한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어떤 것, 사랑이 없는 힘의 모습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없었던 완벽한 카리스마는 끝없이 표류할 뿐 세상에 뿌리박지 못한다.
진실로 위대한 국민은 결코 이류 인류의 역할에 만족할 수 없으며, 일류라 하더라도 오로지 자신들만 유일하게 제일이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잃은 자는 이미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많은 민족들 중 오로지 한 민족만이 진정한 신을 갖습니다. 비록 다른 민족들이 모두 저 나름의 유일하고 대단한 신을 갖는다 해도 말입니다. ‘신을 가진’ 유일한 국민, 그것은 바로 러시아인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정말로 당신은 나를 지독한 바보로 여기고 있습니까, 스타브로긴?” 돌연 그가 광분해서 절규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한 말이 모스크바에 있는 모든 슬라브주의자들의 제분소에서 갈고 갈아서 낡아 빠진 진부하고 엉터리 같은 소리인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최근의 말인지, 아니면 혁신과 부활의 말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그런 바보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 순간만은 당신이 나를 비웃건 말건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당신이 제 말을 완전히, 한마디도,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고 해도 난 개의치 않습니다! 오, 이 순간 내가 당신의 그 오만한 조소의 눈길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에 거품마저 물고 있었다.
“아니, 샤토프, 완전히 그 반대일세” 하고 스타브로긴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채, 매우 진지하고 자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히려 자네는 그 열렬한 말들로 놀랄 만한 강렬한 기억들을 내 안에 불러일으켰네. 나는 자네가 한 말 속에서 2년 전 나 자신의 성향을 봤다는 것을 인정하네. 이제 더 이상은 아까처럼, 자네가 당시의 내 사상을 과장하고 있다는 둥의 소리는 하지 않겠네.”
(…)
“하나만 묻겠네.” 니콜라이 브세볼로도비치가 준엄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자네가 신을 믿는가 어떤가 하는 거야.”
“저는 러시아를 믿습니다. 전 러시아 정교를 믿고 있습니다. 전 그리스도의 몸을 믿습니다…. 전 새로운 강림이 러시아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전 믿습니다….” 샤토프는 미친 듯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신은? 신을 믿는가?”
“전… 전 신을 믿을 것입니다.”
스타브로긴은 얼굴 근육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샤토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전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 눈빛으로 그를 태워 버리겠다는 듯이.
“그렇다고 지금 제가 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침내 그가 이렇게 소리쳤다. “전 저 자신이 다만, 불행하고 따분한 한 권의 책이며 당분간은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님을 당신에게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당분간, 당분간만요…. 하지만 내 이름을 파멸시키시오!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란 말입니다…. 전 별 재주도 없는 인간이고, 그러니 자신의 피를 바칠 밖에요.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재주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멸시키시오, 나의 피도! 전 당신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전 여기서 2년 동안이나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전 지금 반 시간 동안이나 알몸으로 당신을 위해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오직 당신만이 깃발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고, 절망에 빠진 듯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쥐어뜯었다.
≪악령 천줄읽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204∼206쪽
샤토프와 스타브로긴의 이 토론 장면은 무엇을 제시하는가?
사랑과 증오의 완벽한 이중주다. 샤토프는 스타브로긴의 영향으로 신인론에 심취하지만 막상 그 사상을 불어넣은 스타브로긴은 신을 믿지 않는다. 샤토프는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은 사상적인 스승인 스타브로긴의 실체를 보며 실망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카리스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발자취 하나하나에 입을 맞출 것이라 얘기한다.
이 작품은 당대의 어떤 사상 흐름을 반영하는가?
1840년대 온건한 자유주의자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교육한 모든 사람들이 나중에는 1860년대의 허무주의자들이 된다. 그중 그의 정신적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거부할 수 없는 외적 내적 카리스마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모두 부정적이고 파멸적인 영향이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스테판의 생물학적인 아들이고, 니콜라이는 스테판의 정신적 아들이다. 1840년대의 온건한 자유주의가 1860년대의 과격하고 혁명적인 허무주의의 탄생에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다.
신인론이란 무엇인가?
신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는 이론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샤토프는 “러시아가 신을 가진 유일한 국민”이고 국민은 신의 체화이니, 러시아 민중이야말로 신 그 자체이며, 이제 성스런 러시아는 예수가 그러했듯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인내하며 이 세상을 구원하게 된다고 믿었다.
“러시아가 신을 가진 유일한 국민”이라는 믿음의 근거는 뭔가?
이반 3세는 최후의 비잔티움 황제의 조카딸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했다. 이로써 모스크바 궁정은 제1로마를 잇는 비잔티움의 어휘, 의식,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제1로마가 게르만 침략으로 함락되고, 제2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플도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자 러시아의 차르는 자신이 그리스 정교도의 유일한 정통 군주이고 모스크바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인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후계자, 즉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한다. 이 사상은 후대 러시아인, 특히 슬라브주의자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부심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슬라브주의자 인텔리겐치아의 반서구 이념의 핵심 논리는 무엇인가?
유럽 계몽주의와 산업화한 문명을 옹호하는 서구주의에 반대해 일어난 인텔리겐치아들의 움직임이다. 러시아 민중과 러시아 땅에 대한 신격화에 가까운 이상화가 특징이다. 진정한 러시아적 가치와 개념, 신앙이 서구의 이성주의 교육과 사상으로 인해 귀족이나 인텔리겐치아에게서는 사라졌지만 민중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었다.
산업주의 서구 문명으로부터 러시아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찾는가?
러시아 민중은 대부분 농노거나 농사꾼이다. 따라서 그 젖줄인 러시아 땅도 신성시한다. 땅과 민중은 신의 체현이기에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책이다. 땅으로 돌아가 농부들의 노동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믿음이다.
키릴로프가 주장하는 “인신(人神)론”은 이성주의 아닌가?
신은 인간의 창조주로서 생로병사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체인데, 그런 신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인간인 우리가 주관할 수 있으니 우리가 신이 된다는 것이다. 독실한 그리스 정교 신자였던 도스토옙스키 속에 있는 또다른 자아, 이성의 목소리다.
이성의 목소리는 승리하는가?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서 이성적이고 이론적인 사상가들, 달변가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잣대는 합리성이나 이성이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생생한 감각에 의해 결정된다. 이성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이들은 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인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는 악령에 씐 돼지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물속에 빠져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멸의 길이다.
이성으로 불가능하다면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나?
합리성과 이성, 과학을 초월하는 러시아적 형제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사랑만이 신으로 가는 길이다.
‘악령’이란 타이틀은 성경 이야기인가?
누가복음 8장 32~35절을 보면 예수가 귀신 들린 사람을 구한다. 쫓겨난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호수에 빠져 죽는다. ‘악령’이란 바로 이 귀신을 뜻한다.
테마 역시 성경에서 비롯했나?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모두 성경적인 테마가 아주 강하며, 복음서로부터 직접 발췌한 부분들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누가복음의 돼지 에피소드와 묵시록의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것의 이야기가 작품 전체의 테마를 집약해서 보여 준다.
작가가 본 악령은 무엇인가?
러시아를 병들게 하는 온갖 서구 사상이다. 개인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무신론, 물질 만능주의, 이 모든 것이 러시아의 형제애, 동포애, 대지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을 병들고 죽게 만드는 악령이요, 문둥병자의 몸을 덮은 고름과 부스럼이다.
서구 사상을 악령으로 보게 되는 작가의 정서 환경은 무엇이었나?
작품 집필 당시인 1860년대 러시아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유럽식 자본주의와 서구적인 사고방식이 대거 유행했다. 슬라브주의자인 도스토옙스키는 서구 사상에 물들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상으로 변해 가는 러시아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러시아는 곧 악령에 씌어 고통 받는 미친 사람이며 악령을 돼지 떼에게로 몰아내서 몰살시켜야 러시아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슬라브주의자가 되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
20대의 도스토옙스키는 당대에 유행하던 서구의 퓨리에주의나 사회주의가 제시하는 유토피아 등에 경도되었다. 그 결과 4년간의 수감과 6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겪게 된다. 감옥에서 허용된 책은 성경 하나뿐이었다. 수감 생활 동안 성경만을 읽으며 지낸 그는 유형이 끝날 무렵, 마치 ≪악령≫의 샤토프처럼 180도로 사상을 전환해 골수 슬라브주의자가 되었다.
4대 장편 중 ≪백치≫와 ≪악령≫이 비극으로 끝나는 환경 요인이 있는가?
유럽에서 썼기 때문이다. ≪악령≫은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아내 안나의 손에 이끌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쳐 유럽을 전전한 지 4년을 훌쩍 넘긴 해에 썼다. 슬라브주의자인 작가에게 러시아를 떠나 유럽에서 사는 것은 정신적인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도박 중독과 외국인과 외국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했고, 러시아에 대한 향수병으로 정신은 불안정했으며, 지병인 간질 발작도 잦았다. 심신이 다 불행했다. 당연히 집필하는 작품도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이 네차예프 사건에서 빌려 온 내용은 어떤 것인가?
플롯부터 배경,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따왔다. 1869년, 과격한 무정부주의적 혁명론자인 세르게이 네차예프는 모스크바 농대생을 규합해 5인조 비밀 결사를 조직해 사회 정치 제도 전복을 꾀한다. 그중 한 명인 이바노프가 탈퇴하려 하자 밀고 우려가 있다며 다른 동지들을 동원해 그를 살해한다. 혁명을 위해서는 거짓, 공갈, 사기, 살인도 불사한다는 네차예프의 이론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악령≫이 실제 사건에 대한 정치 팸플릿에 가깝다는 비판은 정당한가?
표면적으로는 당대의 정치 이념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고, 정치 사상적 이슈를 다루는 내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정치적인 내용에 탁월한 심리 묘사와 종교적인 색채를 더해 담론을 예술적으로, 또 성경적이고 묵시론적으로 이끈다. 정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는 있으나, 다루어지는 거대 철학들과 심리 묘사와 성경적인 상징들은 이 비판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 작품에서 네차예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정치적 플롯의 중심인물이자 음모가인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로 형상화된다. 네차예프가 혁명과 반란, 그리고 이바노프 살인 사건 등 모든 음모의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무도회, 살인, 방화, 음모 등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수행한다. 묵시론적 상징의 차원에서 서구에서 온 무신론의 화신인 그는 에덴동산의 뱀이자 묵시록의 붉은 용, 사탄이다.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표트르 베르호벤스키가 있다면 그 근원에 있는 사상 담론의 중심은 누구인가?
니콜라이 브세볼로도비치 스타브로긴이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스타브로긴의 행동하는 혁명적 분신에 불과했다. 그의 이론은 스타브로긴의 내재적 힘과 카리스마에 기초한다. 스타브로긴은 완벽한 외모에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졌다. 소설 속의 모든 여자들이 그를 사랑하고 모든 남자들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굴복한다.
완벽한 인물의 파멸에는 어떤 이유가 기다리고 있는가?
내면에 사랑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것’의 체현이다. 선과 악, 감사와 증오, 신앙과 무신론, 인신과 신인(神人), 거짓과 진실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은 있지만, 사랑이라는 방향타가 없었기에 이 힘을 어디다 써야 할지 몰라 방탕함에 모두 낭비한다. 잉여 인간의 극치다. 사랑이 없고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없는 그는 가면 같은 존재, 영혼 없는 납 인형에 불과하다.
발췌와 번역의 고심은 어떤 것이었나?
≪악령≫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 작가를 평생 괴롭힌 거대 사상들의 각축장이다. 러시아 제3로마 이론, 참칭자 드미트리와 이반 차레비치 신화, 유로디비이 전통, 신인론과 인신론,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자유주의와 허무주의 등 각종 문제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잘라 보여 줘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이 작품을 정복하고 나면 다른 작품을 읽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
김정아다.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