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가훈
설을 맞는 마음 6. 화목한 가족을 위한 지혜 ≪안씨가훈顔氏家訓≫
화목하세요?
안지추는 후손을 위해
≪안씨가훈≫ 20편을 남겼지만,
자식들에게 친히 경서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경서에 적힌 한 글자 한 문장이 무척 소중하나
부자간 나누기에는 부적절한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가족 내 자신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화목도 행복도
서로 삼가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다.
화목한 가족을 위한 지혜
부친은 자식에게 위엄이 있어야지 너무 허물이 없을 수 없고, 골육 간에는 사랑이 있어야지 소원할 수 없다. 소원하면 자애와 효도가 이어지지 아니하고, 너무 허물이 없으면 태만이 생겨나게 된다. 관직을 받은 선비 이상부터는 부자가 떨어져 거처하는 것이 너무 경솔하지 않게 되는 도리다. 아픈 곳을 주물러 드리고 이부자리를 정리해 드리는 것이 소원하지 않게 되는 교훈이다. 혹자가 “진항은 군자가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듣고 좋아했는데,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는 도리가 있노라. 대개 군자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시경≫에는 풍자의 말이 있고, ≪예기≫에는 꺼림이 있는 훈계가 있으며, ≪서경≫에는 패도의 일이 있고, ≪춘추≫에는 음란한 비방이 있으며, ≪역경≫에는 각종 기물의 형상이 있으니, 모두 부자간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므로 친히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형제가 화목하지 않으면 자식과 조카 간에 우애가 있지 않고, 자식과 조카 간에 우애가 있지 않으면 집안의 자제들이 멀어지며, 집안의 자제들이 멀어지면 노복들이 원수같이 될 것이다. 이와 같으면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깔보고 함부로 대할지니 누가 그들을 구원해 주겠는가. 사람들은 간혹 천하의 선비들과 교류하며 즐거워하면서 형에 대한 공경을 잃어버리니, 어찌하여 많은 사람에게는 할 수 있으면서 소수의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간혹 수만의 군사를 이끌어 사력을 다해 싸우도록 하면서 아우에게는 은혜를 배반당하니, 어찌 소원한 사람들에게는 할 수 있으면서 친한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인가!
동서 사이는 다툼의 여지가 많다. 혈육이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은 각기 도처로 떨어지게 하는 것보다 못하니,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에 흐느껴 서로 그리워하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서로를 생각한다. 하물며 낯선 사람이 다툼의 여지가 많은 곳에 처하게 되면, 간극이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은 공무를 처리함에 사사로운 감정으로 집행하고, 중책을 맡아서는 얕은 정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에게 관대하듯이 남에게 행하고, 형제의 자녀를 자신의 자녀처럼 사랑한다면 이런 근심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안씨가훈≫, 안지추 지음, 박정숙 옮김, 27∼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