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사회 22-1호
신간 저널 탐색 2. <<언론과 사회>>가 찾아 나선 현재의 부재
현재가 사라진 자리
사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면, 이대로 살면 되는지 자신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꿈같거나 또는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면 질문하라. 우리에게 현재가 있는가?
현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방법은 지속되는 이 순간을 감응하여 지각하는 것뿐이다.
“감응 연구 관점에서 본 ‘현재’의 부재”, <<언론과 사회>> 22-1호, 52~53쪽.
감응의 눈으로 보면 2014년 한국 사회는 무엇인가?
모순의 사회다. ‘현재’가 미래의 이름으로 저당되었다.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것 아닌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창조경제’, ‘힐링’ 같은 담론은 위로나 희망처럼 보인다. 사실은 공포이고 모순이다.
힐링이 왜 모순인가?
현재를 감응하지 않고는 절대 이 말들이 제시하는 미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담론 어느 것도 현재의 감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재는 어디로 갔는가?
현재는 실천 속에 있다. 현재를 만나려면 현재를 살고 겪는 수밖에 없다. 사회와 문화와 타자를 직접 감각하고 경험해야 한다.
현재는 나 바깥에 있는가?
아니다. 타자와 주체가 함께 변하는 ‘되기’ 과정이다.
되기 과정에서 감응은 무엇을 하는가?
감응은 개인과 타자 사이의 관계와 상호성을 복구하고 공통성을 강화한다.
감응은 사회성인가?
고통스럽더라도 타자와의 공통성을 추구하고 현재를 함께 겪으면 감응이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감응이 확산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울, 불안, 기쁨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집단적이고 물질적이며 신체적인 것이다. 감응 연구는 개인의 일상성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공동체성과 만나는 접점으로 안내할 것이다.
감응 연구란 무엇인가?
현재성과 즉시성에 주목하는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연구다. 몸과 정신 혹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인식하려는 학문 태도다.
감응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서인 기쁨과 슬픔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라틴어 affectus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affect다.
감정, 느낌과는 무엇이 다른가?
느낌은 개인적, 생물학적 정서다. 감정은 사회적으로 표현된 정서다. 느낌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 확인되는 감각의 지각을, 감정은 느낌을 표현하고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응은 의식하지 않은 채 일어나는 행위 가능성이나 잠재력이다.
어디서 비롯된 개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나 성리학에서 출발을 찾을 수 있지만 감응 연구에서 다루는 감응은 스피노자, 베르그송, 들뢰즈의 논의에 서 있다.
들뢰즈에서 출발한 것인가?
그렇다. 그는 몸과 정신의 이분법적 논의에 대항했다. 이어 페미니즘과 현상학이 몸, 감각, 감응에 주목했다.
왜 주류 담론이 되지 못했나?
후기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사회는 감응에 대해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극단적인 상품화와 주체의 파편화가 원인이다.
지금은 연구 사정이 어떤가?
2000년대 이후로 느낌, 정서, 감정을 포괄한 감응 연구가 활발해졌다. ‘감응으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에서 무엇으로 전환했는가?
재현과 텍스트 연구로부터 몸, 경험, 감각과 물질로 연구 중심이 이동되었다.
왜 지금 이 연구가 다시 활발해진 것인가?
서구의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에 도전하는 지적 움직임이 철학, 과학, 문학을 가로질러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몸과 테크놀로지, 물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도 원인이다.
신자유주의가 바꾼 우리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공적인 삶과 공공재 그리고 사적 영역조차 상품으로 만들었다. 개인의 삶은 고단해지고 사회적 신뢰는 약해졌다. 그러면서도 희망찬 미래를 위해 지금을 견뎌야 한다는 자기 계발의 논리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현재’가 사라진 것이다.
현재는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가?
어떤 존재의 삶은 타자와 접촉하고 직접 경험하고 감응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감응하지 말라고 강요받는다. 벌란트가 ‘잔혹한 낙관주의’라 부른 현상이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이유 없이 견디는 상태다. 먹는 즐거움을 앗아가 버리는 다이어트, 취업을 위해 자기 계발과 과잉 노동에 시달리는 청춘, 미래에 대한 헛된 공약으로 현재의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정치가 그런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희은이다.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