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2434호 | 2015년 2월 4일 발행
박선진이 안내하는 새로운 연극의 시대
박선진이 옮긴 레오니트 안드레예프(Леонид Н. Андреев)의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Екатерина Ивановна)≫
새로운 극의 시대
연극은 드러나는 기분이 아니다.
전체의 숨은 기분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
침묵이 지문으로 사용됐다.
침묵은 침묵 자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오르기: 내가 그녀를 다치게 했어.
알렉세이: 아니야, 형수는 괜찮아.
게오르기: 두 번째 총알에 맞았단 말이다.
알렉세이: 아니야, 괜찮다니까, 스쳐 갔어. 하느님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포민, 가서 상황을 좀 알아봐 주겠나.
포민: 어디로 가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렉세이: 문 쪽으로 가 보게, 그래, 그 문, 그 문 쪽으로 말이야…. 이런 젠장, 학교 친구가 처음 놀러 왔는데 이 난리라니…. 어휴, 형,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물 좀 가져다줄까? 손 떠는 것 좀 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어떻게 말이야!
게오르기: 일단은 날 좀 풀어 다오!
알렉세이: 미안, 깜빡했군. 그런데 형, 대체 무슨 일이야?
게오르기: 네 형수가 바람을 피웠다.
알렉세이: 거짓말 마!
게오르기: 정말 너절하기 짝이 없어.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오오, 알렉세이, 사랑하는 나의 알렉세이, 세상이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게냐! 믿을 수 있겠니, 우리의 예카테리나가, 우리의 순결한 예카테리나가 말이다….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지음, 박선진 옮김, 9∼10쪽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게오르기가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 총을 쏘았다. 그녀가 아르카디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고 있다.
바람을 피웠나?
아내를 미행했다. 그녀가 아르카디와 호텔 방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함께 있는 걸 확인했다.
두 시간 넘도록 무슨 일이 있었나?
예카테리나가 아르카디의 따귀를 때렸다. 2년째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치근덕대고 있었다.
의심의 결과는 뭔가?
예카테리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난다. 게오르기는 절망에 빠진다.
진실은 언제 밝혀지는가?
반년 뒤, 게오르기가 아내를 찾아간다. 둘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게오르기에게 돌아가기를 주저한다.
왜 주저하는가?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자 분노한 예카테리나는 아르카디에게 몸을 허락했다. 임신이 됐고, 중절 수술을 받았다.
게오르기는?
용서를 구한다. 예카테리나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한다.
둘은 재결합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전과 같진 않다. 예카테리나 내면에서 정결한 자신을 의심했던 남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대한 사랑, 실망이 뒤얽힌다. 스스로도 몰랐던 살로메적인 욕망이 분출된다.
살로메의 욕망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방탕의 나락에 빠진다. 남편 친구들과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게오르기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다. 남편과 그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살로메로 분해 일곱 베일의 춤을 추고는 그중 한 명과 떠나 버린다.
타락의 동력은 무엇인가?
자신을 의심하고 손가락질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누군가는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구원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은 욕망을 채우고는 곧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 허무함 때문에 파멸해 간다.
안드레예프의 대표작인가?
작가 스스로 ‘자신에게서 새로운 극의 시대는 바로 이 작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왜 바로 이 작품이었나?
그에 따르면 새 시대의 연극은 ‘드러나는 기분’을 표현한 극이 아니라 ‘숨어 있는, 전체적인 기분’을 나타낼 수 있는 극이어야 했다. 범심론극이다. 이를 위해 그는 ‘침묵’이라는 지문을 사용했고, 이 작품은 ‘침묵’을 두드러지게, 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희곡이다.
‘침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저항의 표현으로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단순히 자기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어떤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말을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등장인물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 ‘침묵’이다.
‘고요’한 상태와는 다른 것인가?
안드레예프에게 ‘고요’란 투쟁이 없는, 즉 긴장된 지적 작업이 부재하는 상태를 뜻한다. ‘고요’가 사방이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라면 ‘침묵’은 어떤 지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는 무대 위에 있는 한 ‘고요’란 있을 수 없으며,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인식하든 아니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침묵’이라는 지문 속에서 활발히 연기를 펼친다고 주장했다.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누구인가?
고리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작가’다. 시대를 앞서 간 문학적 실험가였다.
어떻게 살다 갔나?
1871년 오룔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서 신문과 잡지 법률 담당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첫 작품을 발표했다. 고리키의 눈에 띄어 문학 그룹 지식파에 가입했다. 등단 이후 개성 있고 재능 넘치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았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핀란드로 떠났다가 1919년 핀란드 한 시골 마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선진이다. 계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초빙조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