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2561호 | 2015년 4월 28일 발행
최복현이 옮긴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의 ≪운명(Les Destinées)≫
침묵의 이유
인간이 불행에 빠졌을 때, 자연은 언제나 무정하고 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신음하고 울고 기도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운명은 자비가 없다.
무한히 크고 무거울 뿐이다.
침묵 외에 인간의 선택은 없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것,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침묵만이 위대하고 나머지는 나약한 것이다.
아아, 야생의 방랑자여, 이제 너의 뜻을 깨달았으니
너의 마지막 눈초리는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눈초리는 말했다;
“할 수 있다면 노력하고 심사숙고하여 너의 영혼이
숲 속에서 태어난 우리가 맨 처음 올랐던
고결한 지고의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하라.
신음하는 것, 우는 것, 기도하는 것은 모두 비열한 일이니,
운명이 너를 부르려는 길에서 너의 길고도 무거운 책무를 힘껏 다하라.
그러고는 나처럼 고통을 당하고 말없이 죽어 가라.”
<늑대의 죽음>, ≪운명≫, 알프레드 드 비니 지음, 최복현 옮김, 100쪽
그 눈초리가 말한 ‘나’는 무엇인가?
늑대다. 잔인한 사냥꾼과 사냥개를 만나 죽을 위기에 놓였다.
죽을 위기에서 어떻게 하는가?
처음에는 사냥개의 목을 물고 놓지 않았다. 싸웠다. 곧 저항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다. 투쟁을 포기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어떤 모습이었는가?
경멸하는 시선으로 사냥꾼을 바라본다. 묵묵히 죽음을 맞는다.
시인의 메시지는?
불행과 고통 앞에서 최선을 다하라. 안 되면 운명을 감수하라. 말없이.
말하면 안되는가?
말이 많으면 품위를 잃는다. 시인은 불행한 운명 앞에서 ‘신음하지도, 울지도, 기도하지도’ 말라고 한다. 침묵할 뿐이다.
그에게 침묵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고상한 삶이란 신에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침묵하면 깨우거나 애원하지 않고 같이 침묵하는 삶, 이것이 비니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극기주의 사상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철학자 제논이 주장했던 사고 방식이다. 인간은 오직 이성을 따르면서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어떻게 극기할 수 있는가?
자제심, 자기 포기가 필요하다. 어떤 불행 앞에서도 태연자약해야 한다. 불행에 울부짖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직시하라. 운명은 자비가 없다. 그것은 무한히 무거울 뿐이다.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체념 이외의 길은 없는가?
없다. 자연은 무정하고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침묵할 뿐이다. 그래서 허무하고 부조리하다. 이 비극의 숙명은 시시포스를 닮았다. 비니의 이런 사상은 실존주의를 예비한 비관론이다.
그의 비관론은 어떤 모습인가?
비니는 예수의 삶과 죽음, 모세의 고민, 삼손의 분노를 시로 썼다. 결정적 순간에 인간은 고독한 존재로 남는다. 그렇다고 나약하게 자살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늑대처럼 장렬하게 투쟁하다 죽어야 한다.
그는 어쩌다 비관론자가 되었는가?
비니는 1797년 프랑스 군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군인 생활을 계속했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고 반대파인 루이 필리프가 정권을 잡은 데 실망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이때부터 염세적인 비관주의를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알프레드 드 비니는 어떤 인간인가?
자신의 철학을 시로 표현했다. 생전에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1864년 사후 시집인 ≪운명≫이 발표되고 나서 명성을 얻었다.
≪운명≫은 어떤 시집인가?
시인이 25년간 사색하고 명상한 사상과 시적 고행의 정수다. 11편의 철학적인 시가 실려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복현이다. 불문학을 공부했다. 시인이고 저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