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천줄읽기
미리 만나는 봄 3. 월든 호숫가의 봄날 ≪월든(Walden)≫
초록 불길
오늘 봄을 미리 만날 곳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근처 월든 호숫가입니다. 마침내 알맞은 각도에 도달한 햇빛이 눈 덮인 언덕을 녹이면 그 틈새로 봄이 살금살금 돋아나다가 어느새 거센 불길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보릿대국화, 미역취, 황새풀, 부들, 현삼, 물레나물, 조팝나무, 피리풀, 등심초…. 대지를 덮치는 그 불길의 색깔은 초록색입니다. 싱그러운 생명의 힘을 간직해 온 풀잎들이 마른 잎 끝을 다시 치켜들며 그 초록을 영원을 향해 내뻗는 것입니다.
땅 위를 덮었던 눈이 군데군데 녹고 며칠 동안의 따뜻한 날씨가 지표면을 조금 마르게 할 때, 살금살금 돋아나는 새해의 부드러운 첫 징조들을, 겨울을 견디느라 초췌해진 식물들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비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여러해살이풀인 보릿대국화와 미역취 같은 우아한 야생초들은, 마치 그때까지는 아직 아름다움이 무르익지 않았던 듯이, 지난여름보다 더 눈에 잘 띄고 관심을 끈다. 그 밖에 황새풀, 부들, 현삼, 물레나물, 조팝나무, 피리풀 같은 강인한 식물들은 일찍 찾아온 새들을 즐겁게 해주는 마르지 않는 곡물 창고가 된다. 이들은 과부가 된 대자연이 몸에 걸친 우아한 잡초들이다.
나는 특히 윗대가 휘어져 다발 모양이 된 등심초의 모습에 매료된다. 우리의 겨울 회상에 여름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이 풀은 예술이 즐겨 모방하는 형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천문학처럼 식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은 유형들과 동일한 관계를 갖는다. 이 풀의 유형은 그리스나 이집트의 유형보다 더 오래되었다. 겨울의 여러 가지 현상들은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깨지기 쉬운 섬세함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겨울을 난폭하고 시끄러운 폭군으로 묘사하는 표현에 익숙하지만, 겨울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여름의 긴 머리칼을 치장해 준다.
봄이 다가오자 붉은 다람쥐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내 집 밑으로 들어와서는, 내가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바로 내 발 밑에서 이제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이상하리만치 낄낄거리고 짹짹거리며, 급회전하다가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다. 내가 발로 마룻장을 쾅쾅 구르면, 다람쥐들은 장난의 재미에 빠져 두려움과 존경심을 잃어버리고 그들을 멈추게 하려는 인간에 도전하려는 듯 오히려 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러지 맙시다, 찍찍찍찍. 그들은 나의 항변을 전혀 못 듣거나 그 속에 담긴 위력을 깨닫지 못한 채,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욕설을 연속해서 퍼부었다.
봄의 첫 참새! 그 어느 해보다 힘찬 희망과 함께 시작하는 새해! 군데군데 헐벗은 축축한 들판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랑새와 멧종다리와 티티새의 은빛 노랫소리는 겨울의 마지막 눈송이들이 내리면서 내는 짤랑거리는 소리 같기만 하다. 이런 때에 역사와 연대기, 전통과 모든 기록된 계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냇물은 봄에게 찬가와 축가를 바친다. 풀밭 위를 맴돌며 나는 매는 잠에서 깬 진흙탕의 먹잇감을 찾고 있다.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소리가 모든 계곡에서 들리고, 호수의 얼음도 빠르게 녹고 있다. “봄비의 부름을 받고 풀들은 처음으로 싹튼다”는 말처럼, 마치 대지가 되돌아오는 태양을 맞이하려 내부의 열을 발산하는 듯이 언덕마다 풀들이 봄 불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 불길의 색깔은 붉은색이 아니고 초록색이다. 영원한 청춘의 상징인 풀잎은, 기다란 초록 리본처럼 흙에서 솟아올라 여름 속으로 피어나다가 서리의 제지를 받고서 시들어버리지만, 그 속에 간직한 싱그러운 생명의 힘으로 지난해의 마른 잎 끝을 치켜들며 또다시 뻗어 나는 것이다.
땅속에서 스며 나와 흐르는 시냇물처럼 풀잎은 꾸준하게 자라난다. 풀잎과 시냇물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이 성장하는 6월에 시냇물이 마르면 풀잎이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되어 1년 내내 가축들은 이 영원한 푸른 시내에서 물을 마시며, 풀 베는 사람들은 여기서 때맞춰 겨울의 비축물들을 모은다. 사람의 생명도 시들어 뿌리만 남지만, 그 초록 잎을 영원을 향해 내뻗는 것이다.
≪월든≫, 헨리 소로 지음, 윤희수 옮김, 94∼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