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단편집 초판본
미리 만나는 봄 4. 봄날의 벚꽃 놀이 ≪초판본 유진오 단편집≫
무심한 봄의 희망
화자(話者)는 성홍열 걸린 어린 아들을 전염병동에 입원시킨 아비다.
병원 안의 환자들은 생사의 고투를 벌이고 있는데,
길 건너 병원 밖의 풍경은 밤 벚꽃 놀이 준비가 한창이다.
계절이 무심한 걸까, 사람이 무심한 걸까.
여러 날이 걸리더라도 꽃망울이 꽃송이로 피어날 것을 믿기에
무심한 봄바람이야말로 우리에게 새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지도 모른다.
안해에게 갖다줄 ‘스시’를 싸들고 식당을 나서니 창경원 앞 큰길에 병원과는 한평생 아무 인연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득히 왔다 갔다 한다. 창경원 속에서는 야앵(夜櫻) 준비하느라고 야단들이었다. 병원 언덕에 서서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듯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꽃등을 달고 전기줄을 끄을고 하느라고 전기 공부들이 원숭이같이 나무가지에 매달려 야단이다. 따는 하룻밤 동안에 갑자기 절기가 바뀌기나 한 듯이 등에 비치는 햇살이 포근포근 따듯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전염병실 앞 민틋한 언덕으로 올라가며 늘어선 벗나무 가지를 손에 휘여잡아 보니 꽃봉우리는 아직도 단단한 껍질 끝으로 겨우 방긋이 분홍색 부리를 내밀었을 뿐 그것이 자라고 피어 탐스런 꽃송이가 되기까지에는 앞으로도 여러 날 걸닐 상싶었다.
≪초판본 유진오 단편집≫, <봄>, 유진오 지음, 진영복 옮김, 88∼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