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 일가
양승국이 해설한 송영의 ≪尹氏 一家≫
1930년대 조선의 아버지
노동자 윤씨, 사장이 딸을 탐낸다. 유처취처, 곧 아내가 있는데 아내를 얻으니 첩의 자리다. 장남은 반대하고 아내는 눈치만 살핀다. 사장의 장인이 될 것인가, 딸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
世鉉: 뭐 길게 말씀할 게 없습니다. 김 주사와 말씀하신 것은 모두 파의해 버리십쇼.
尹: 뭐라고 말을 했는데.
世鉉: 世淑이를 社長 녀석의 첩으로 주신다고 그러셨겠죠.
尹: 첩은 왜 첩야.
世鉉: 유처취처가 첩이 아니면 뭡니까.
尹: 본처는 이혼을 한다기에 승낙을 했는데.
世鉉: 그걸 말씀이라고 하셨습니까.
尹: 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다. 세숙이가 본처로 들어가게 된다면야 세숙이 자신도 호의호식을 하겠지만.
世鉉: (흥분이 돼서) 아버님도 감독이 되시고, 밭때기 논때기도 생기시고.
尹: 아니 너는 아비가 아비로 보이지가 않니? (언성이 높아진다.)
白: 왜 이렇게들 왁자들 하슈. 좀 종용종용히 이야기를 해도 넉넉할 텐데!
尹: 임자는 가만히 있어요. (더 크게 世鉉에게) 그래, 아비가 아비 같지가 않으냐.
世鉉: 아버지는 아버지시지만, 이번 하신 일은 아버지다운 일이 아니시라고 생각합니다.
尹: 좋다, 나는 아비가 아니다.
世鉉: 그럼 뭡니까? 아버지, 아무리 지내시기가 군색하더라도 귀한 딸의 앞길까지 짓밟으시려고 합니까.
尹: 짓밟다니.
世鉉: 막말로 팔아먹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尹: 마찬가지다. 흥. 딸을 팔아먹는다. 좋다. 나는 못된 놈이다. 기생 아비다. 돈밖에 몰르는 놈이다. 구루마만 끌던 놈이 자식이 뭔지 애비가 뭔지 알겠니.
世鉉: 아버지 그렇게 역정만 내실 것이 아닙니다. 순리로 생각을 하시면 그렇지 않습니까? 가난할쑤록 청염한 절개만은 딸려 다녀야 합니다. 돈 때문에 없인여김은 받을지언정, 마음으로까지 남에게 굽힐 것이 뭣 있습니까? 아버지 더군다나 세숙이에게는 이기환이라는 약혼한 사내가 있지가 않습니까.
尹: 난, 다 몰른다. 난 자식 팔아먹는 놈이다.
≪尹氏 一家≫, 송영 지음, 57∼58쪽
아비가 딸자식을 팔아먹는 장면인가?
김 주사가 처음 이런 제안을 했을 때는 윤씨도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사장이 곧 본처와 이혼할 거라고 하고 감독 자리까지 준다니 승낙한 것이다.
장남과 어미의 생각은 무엇인가?
장남 세현은 크게 반대한다. 아내 백씨도 처음에는 이 일을 내심 반기는 눈치였지만 부자간에 다툼이 생기자 일을 무르자고 한다.
부자의 대립은 어디로 이어지나?
세현이 끝까지 자신을 탓하자 윤씨는 누가 뭐래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고 성낸다. 세현은 아버지가 마음을 고쳐먹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겠다며 집을 나간다.
갈등의 끝은 무엇인가?
윤씨는 그날 저녁 쌀과 돈을 들고 찾아온 김 주사에게 세숙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한다. 기분이 상한 김 주사는 당장 먹고살 일을 걱정해야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고 떠난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세현은 반드시 크게 성공해서 돌아올 테니 세숙을 남의 첩으로 주지 말라고 당부하는 편지 한 통을 전하고 떠난다.
세현의 가출로 극이 끝나는 것인가?
세현이 끝내 떠난다는 결말은 극 전체의 통일성을 깨뜨린다고 비판받았다. 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이라는 장치를 자주 활용하던 당대 상업극의 영향이다.
송영이 상업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의 극인가?
1939년 7월 ≪문장≫에 발표한 단막극이다. 그가 상업 작가로 활동할 때였지만 그 취향에만 함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어떤 노력인가?
송영의 주된 극작술이 풍자를 통해 비판을 유도했던 데 반해 이 작품은 희극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노동자 가정의 일상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딸을 파는 것이 1930년대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이었나?
윤씨 일가의 가난한 삶은 당대 노동자들의 힘겨운 생활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 보인다. 특히 윤씨가 감독 승진과 해고 사이에서 겪는 고통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노동자 전체의 삶이라는 집단 차원의 고민으로 확대된다.
송영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가난하지만 바르게 살아가려는 윤씨 일가를 통해 혼탁한 현실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언제부터 사회 현실에 눈을 떴는가?
배재고보에 다닐 때 3·1운동을 겪은 뒤로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문학 행보는?
1922년 프롤레타리아 문예 단체인 염군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염군≫을 기획했다. 이듬해 일본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며 경험의 폭을 넓혔다. 1925년 ≪개벽≫ 현상 공모에 희곡 <늘어가는 무리>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후 1935년까지 카프에 참여했으며, 아동 문예 운동, 연극 운동, 소설 창작에 힘썼다. 카프가 해산되자 동양극장 문예부원으로 활동하며 대중극 대본을 썼다.
해방 후엔 무엇을 했는가?
월북해 1946년 작가동맹상무위원을 시작으로 조선연극인동맹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요직을 지냈다. 정신 질환을 앓다가 1978년,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양승국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