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시선
김의정이 엮고 옮긴 ≪이상은 시선(李商隱詩選)≫
시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
시인은 감정이 무르익은 순간 어떤 사물을 만난다. 마음과 물질이 완전히 하나가 되면 시는 예술이 된다. 모자라거나 넘치면 답답하거나 소란해진다. 비흥은 쉽지 않다.
무제−만나기 어렵지만 이별도 어려워(無題−相見時難別亦難)
만나기 어렵지만 이별도 어려워,
봄바람 힘 잃고 온갖 꽃 시들어 가는데,
봄날 누에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촛불은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겨우 마른다네.
새벽에 거울 보며 귀밑머리 희어진 것만 근심하지만,
한밤중 시 읊으면 분명 달빛 차가운 것 느끼리라!
봉래산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파랑새야! 나를 위해 은근히 찾아봐 다오!
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春蠶到死絲方盡,
臘炬成灰淚始乾.
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
蓬山此去無多路,
靑鳥殷勤爲探看.
≪이상은 시선≫, 김의정 옮김, 155~156쪽
흔히 ‘이별은 쉽고 만나기는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상식을 뒤집은 표현이다. 조식(曹植)은 <내일이 되면 너무 어려워(當來日大難)>에서 “오늘 자리를 같이하지만, 문을 나서면 서로 타향이리. 이별은 쉽고 만남은 어려우니, 각기 술잔을 비우세(今日同堂, 出門異鄕. 別易會難, 各盡杯觴)”라고 했다. 이상은은 더 나아가 만남은 본래 어렵지만 이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짧은 만남 후에 곧 이별해야 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봄누에와 촛불은 무엇을 의미하나?
죽음을 불사하는 연모의 정이다. <늦가을에 혼자 곡강을 유람하며(暮秋獨遊曲江)>에서는 “몸이 있으면 정도 영원하다는 것, 사무치게 깨달아(深知身在情長在)”라고 했다. 육신이 있는 한 정감은 소멸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애정지상주의다.
중국 시단에서 사랑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이상은이 처음이라는 말은 사실인가?
과언이 아니다. 중국 시는 유가의 영향으로 정치적 실패의 슬픔이나 이 슬픔을 함께 나눌 벗의 우정을 주로 노래했다. 이상은 이후에는 사랑을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사(詞)’라는 장르가 생겨 시에서 사랑을 말하는 일은 더욱 드물게 되었다. 이런 때에 그는 집중적으로 사랑을 다룬다.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언어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공을 세웠다.
시인의 실제 애정 사건에서 비롯된 작품들인가?
꼭 그렇다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주학령(朱鶴齡)은 이상은의 정치 성향을 중시해 그의 작품을 애정을 빌려 회포를 말한 작품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면 “어느 곳 슬픈 쟁 소리가 급한 관악기 소리를 따라가나?”는 가난한 집안의 노처녀가 시집가지 못하고 애태우며 잠 못 드는 것을 빌려 자신의 정치적 실지와 불우를 노래했다는 해석이다.
위의 시도 정치적 기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그의 애정시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묻는 작품이 많다. 위 시도 정치적 열망의 일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 정치적 기탁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봄날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슬픔, 죽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현한 애정시로 보는 것이 더욱 흐뭇하지 않은가?
그의 정치시는 어떤 작품으로 나타나나?
옛일을 빌려 은연중에 기탁하는 영사시를 많이 썼다. <수나라 궁궐(隋宮)>, <마외(馬嵬)>, <요지(瑤池)>가 그렇다. 황제의 사치로 인한 국가의 패망, 특정 시기의 역사적 비극, 신화 전설을 노래한다. 옛일을 회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도는 현실 정치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상은이 누구인가?
만당 시기 시인이다. 자(字)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溪生), 혹은 번남생(樊南生)이라 한다. 정교한 대구(對句), 풍부한 용전(用典), 기발한 상상력, 깊은 슬픔이 특징이다. 그의 시는 생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의 상찬을 받았으나 그의 일생은 고난과 실의로 점철되었다. 재주를 품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난 우울한 시인이다.
그가 잘못 만난 당시 당나라 정세는 어땠는가?
그의 당대에 헌종(憲宗)부터 선종(宣宗)까지 황제가 여섯 번 바뀌었다. 균전제 폐지로 지주는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농민은 과도한 세금과 무리한 부역에 시달렸다. 지방에서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 번진(藩鎭)의 할거가 더욱 심각해졌고 조정에서는 환관이 군권을 장악해 황제를 폐위하는 전횡을 일삼았다. 조정 신료 간 당파 분쟁은 더욱 악화되어 우당(牛黨)과 이당(李黨) 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우이당쟁(牛李黨爭)을 낳았다.
중국 문학사에서 이 시인의 위치는 어디인가?
시(詩)에서 사(詞)로 이어지는 운문 문학 과도기의 중요 인물이다. 섬세한 비흥(比興)의 수법으로 정서를 전달한 그의 시는 송대의 안수(晏殊), 안기도(晏幾道), 구양수(歐陽脩), 진관(秦觀), 하주(賀鑄)에게 영향을 주었다. 주방언(周邦彦), 오문영(吳文英)의 작품에서 보이는 깊고 몽롱한 의경(意境)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백, 두보의 표현 방식과는 어떻게 다른가?
성당 시인들은 굳건한 심지로 주, 객관 세계를 모두 장악했다. 이백은 주관이 객관을 압도한다. 두보는 감정을 경물이나 서사에 녹여 표현했다. 만당에 이르면 정서가 섬세하고 미묘해진다. 이상은은 비흥(比興)을 통해 사물에 심상을 기탁해 시의 이미지와 암시성을 대폭 강화한다.
비흥이란 무엇인가?
비유의 ‘비’와 감흥의 ‘흥’이 결합한 말이다. 시 창작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감정이 무르익은 순간 아주 우연히 자신의 마음 같은 어떤 사물을 발견한다. 이때 감정과 사물이 완전히 밀착되면 비흥은 예술로 날아오를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균형이 깨지면 예술은 사라진다.
≪이상은 시선≫은 어떻게 엮었나?
현존하는 600여 수 가운데 68수를 뽑았다. 생활, 역사, 사물, 사랑, 인생이라는 소제목으로 구분해 수록했다.
당신이 만난 이상은은 어떤 사람인가?
인생의 슬픔을 ‘시’라는 언어 예술을 통해 아름답게 승화시킨 사람이다. 남겨진 그의 시를 해독하기란 수많은 주석서를 짚고서도 어둠 속에서 미로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이었으나 비밀을 엿보는 순간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았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이러한 감동의 첫 번째 수혜자는 당연히 시인 자신이었을 것이니 시는 이미 그에게 축복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의정이다. 중국 고전시를 수필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