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홍 동화선집 초판본
김문홍이 엮은 ≪이주홍 동화선집≫
풍자와 해학, 그리고 빠른 문체
그의 뱃속에는 한가한 고양이 이야기도 있지만 날카로운 청어 뼉다귀 이야기도 있다. 소작인이 바친 청어를 모조리 먹어 치우는 지주, 버린 청어 대가리를 삼키다 목에 걸려 고생하는 소작농의 아이. 피가 흐르는 동화를 만날 수 있다.
“아저씨들을 두 번이나 속였으니까 우리도 이번까지 용서를 빌 생각은 없어요.”
하기로,
“물론이지.”
“그렇지만 인젠 정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청을 들어주셔요.”
하는 거야. 그래서,
“뭐야?”
하니까,
“우리가 과자를 훔쳐 먹으려다가 이 지경이 됐으니까, 죽어 저승에 가더라도 원한이나 없게 저 쥐틀 안에 들어 있는 비스킷을 집어내어 나눠 주셔요.”
하기로, 하두 측은해서 내어 주려고 앞발을 넣는데 그만 털커덩… 하고 쥐틀 문이 벼락 치듯 했으니, 힘이 역도 같은 장사면 어떻게 헐 게냐 그 말씀이야. 물으나 마나 그러는 틈에 새앙쥐 놈들은 또 달아나 버렸지. 그런데 그건 그거지만, 나중에 가게 주인이 와서 우리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짐작이나 가겠어?
“이 얼빠진 고양이 놈들아, 얼마나 못났으면 쥐 들라고 해 놓은 틀에 너희 놈들이 치어서 그 꼴이 돼 있는 거냐.”
그 말씀이야. 산통 다 깨뜨려 먹었지 뭐야. 겨우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우리 집으로 돌아오니까, 할아버지는 먼젓번에 내가 앉아 있었던 그 유리창 앞의 의자에 걸터앉아 흔들흔들 콧노래를 부르고 계시다가, 생채기가 나 있는 내 발을 보시더니만 깜짝 놀라시는 게 아니겠어.
“네가 기어코 내 말을 안 듣다가 이 모양이 됐구나. 아직 집 밖에 나가선 안 된다고 내가 그만큼 말을 해 뒀는데, 어딜 가 놀다가 이렇게 발을 다쳐 가지고 왔니 글쎄!”
할아버지는 몹시 측은해하시면서 내 발에다 약을 발라 주시고 붕대를 감아 주셨다. 난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서 야우웅 야우웅… 울고만 있었구나.
할아버지 보기에 부끄럽기도 하고, 고 밤톨만 한 새앙쥐 놈들한테 놀림받은 일을 생각하니 분하기도 하고, 참 복잡한 심정이었을 수밖엔.
그런데, 아아니 세상에 이게 또 무슨 요지경이겠어, 난 할아버지의 가슴에 안겨서 울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건데, 누가 문을 드르륵 열기로 돌아다보니까 그게 진짜 할아버지가 아니겠어! 도대체, 뭐가 어찌 됐다는 거야. 할아버지는 나를 들어서 안고 의자에 앉으시더니만,
“그동안에 얼마나 심심했었니? 우리 살찐인 잠도 잘 자구.”
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물이 언제 있었더냐는 듯이 거리는 본디대로 자동차와 사람들만 분주히 다니고 있는 게 아니겠냔 말야. 그럼, 난 그새 뭘 하고 있었다는 거지?
<살찐이의 일기>, ≪이주홍 동화선집≫, 이주홍 지음, 김문홍 엮음, 128~130쪽
쥐와 고양이 우화인가?
작가 이주홍 할아버지 댁의 고양이 ‘살찐이’의 한바탕 모험이다. 외출한 고양이가 생쥐를 잡으려다 번번이 놓치고 끝내는 생쥐의 꾐에 빠져 덫에 걸려든다. 생쥐와 고양이의 전복된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시대 상황의 비합리성을 암시했다.
이주홍 동화의 특징으로 풍자와 해학, 그리고 속도감 있는 문체를 지적하는데 동의하는가?
이야기의 재미 속에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은근하게 파헤치는 예리한 시선이 숨어 있다. 간결한 설화체·희곡체 문장은 편안하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로 독자를 이끈다.
예리한 풍자란 대개 어떤 것을 말하나?
일제 강점기에 쓴 동화 <청어 뼉다귀>가 있다. 소작인이 바친 청어를 모조리 먹어 치우는 욕심 사나운 지주와, 지주가 다 뜯어 먹고 남긴 청어 대가리를 먹다 목에 걸려 고생하는 소작농 어린이를 그렸다. 지주의 횡포,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한다.
동화에 대한 이주홍의 생각은 무엇이었나?
릴리언 스미스가 말했듯, 아동이란 순수하게 몰염치할 정도로 즐거움만을 위해 읽는 독자다. 이주홍은 <나의 동화·소년소설관>(≪이주홍 문학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아선 안 될 것은 많은 작가들이 동화의 재미성에 대한 불감증을 不感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童話는 글자의 뜻 그대로 ‘아이의 이야기’를 말한다. 이야기라면 줄거리가 筋骨이겠는데 요즘의 동화에는 일반적으로 줄거리의 중요성에 관심을 덜 돌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한 장면의 情景 묘사에 있어서는 어떤 심각한 소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우수한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띄지만 그런 분위기 조성은 어른의 말귀가 그대로 통하지 않을 수도 있는 독자인 아동 자신들 그들 나름대로의 想像領域이 아니겠는가. 물론 상황이 부연적 설명을 아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루하도록 너무 깊이 성인 취미에 집착하고 있었다가는 송아지인 아동은 언제 내뺐는지 모르는 대신에 빈손엔 고삐만 쥐어져 있는 격을 당할 때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수필동화란 이름을 지어 불러도 좋을 만큼, 줄거리 아닌 한 단면을 그려 보인 데에 그친 단편동화를 종종 만날 땐 더욱이 그러한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그의 문체는 작품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걸쭉한 입말의 구수함을 더한다. 마치 손자 손녀를 앞에 앉혀 놓고 할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이 녹아든 입담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무엇이 걸쭉하고 구수하다는 것인가?
“남들은 새벽부터 들판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천하태평으로 잠만 자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냔 말요.”
“난 하루밤 하루낮을 자도 잠이 모자라서 꼭 죽겠는데 왜 또 일어나라고 이 성화를 대는 거요?”
“옛날얘기두 못 들어 봤수? 밥만 먹고 잠만 자고 하면 죽어서 소가 된다고 하잖던가요?”
“허! 모르구 있는 것이 없구먼! 아, 그렇다면 옆집에 있는 소는 누가 죽어서 된 소래?”
“농담의 말만 하고 있지 말구서 어서 밭이나 매러 가요! 아버님두 나가셨지, 시숙님들두 나가셨지, 당신처럼 이렇게 잠만 자는 사람은 이 동네에 한 사람도 없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구서 어서 내 갓이나 내어 놓우.”
“밭매러 가는 사람이 갓은 왜요?”
“누가 밭매러 갈려구 갓을 내놓으래나? 출입을 하려구 갓을 내노라는 거지.”
“인젠 당신도 소견이 나나 보구려. 집안 살림살이가 하도 요 꼴이 돼 있으니까 돈이라도 변통하려구 나가시려나 보지?”
“누가 돈을 변통하러 가. 집구석에서 하도 여러 소리가 많으니까 실컨 잠이나 잘 수 있는 집을 찾아가려구 그러는 거지.”
(<잠만 자던 게름뱅이> 중)
문단에서 이주홍은 어떤 인물이었나?
이오덕은 ‘서민의식에 투철했던 작가’로 평가했다. 시대적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안고 있는 소외층들을 작품의 주요 인물로 삼아, 주체적이고 따뜻하며 강인한 서민을 그려 냈다는 말이다. 이재철은 ‘해학과 풍자, 기지를 통해 아동생활을 관조한 작가’라 했다. 재미를 바탕으로 해 잘 읽히는 아동문학을 제시했다고 봤다.
언제 등단했나?
1928년 ≪신소년≫지에 <배암색기의 무도(舞蹈)>라는 동화가 실려 아동문단에,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가난과 사랑>이 입선되어 일반문학인 소설계에 등단했다.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그뿐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시, 수필, 동시 등 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긴 전방위 문학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의 작품은 무엇인가?
작품이 총 600여 편 된다. 소설집 ≪탈선 춘향전≫, ≪조춘≫, ≪해변≫, ≪풍마≫, ≪신화≫, ≪지저깨비들≫, ≪어머니≫, ≪아버지≫ 등, 시집 ≪풍경≫ 등이 있다. 아동문학 작품집으로는 ≪못난 도야지≫, ≪아름다운 고향≫, ≪비오는 들창≫, ≪피리 부는 소년≫, ≪외로운 짬보≫, ≪톡톡 할아버지≫, ≪섬에서 온 아이≫, ≪살찐이의 일기≫, ≪못나도 울 엄마≫, ≪청개구리≫, ≪해같이 달같이만≫ 등이 있다. 희곡 작품으로는 일제강점기 아동극을 제외하고 <열풍> 등 30여 편이 있다. 또 중국 고전의 번역에도 주력해 ≪수호지≫ 등을 냈다.
다방면의 활동은 다양한 평가를 부르게 마련인데 그는 어떤가?
‘어느 한 분야에서 독창적인 고도의 작품을 생산하지 못했다’와, ‘모든 작품이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문학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등 엇갈린 평가와 반응이 있다. 그러나 전자의 평가는 다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우리 문단의 고정관념에서 기인한다. 향파 이주홍은 우리 시대가 낳은 진정한 르네상스인이다.
르네상스인이라는 주장은 서예와 삽화 때문인가?
그림은 ≪신소년≫ 등의 잡지를 편집하고 직접 표지화와 삽화까지 그릴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의 위원장에 피선한 적도 있다. 조선문학가동맹 소설위원회에서 편한 1946년판 ≪조선 소설집≫, 1956년 발간된 김정한의 창작집 ≪落日紅≫, 1966년 회갑 기념 산문집 ≪뒷골목의 낙서≫와 1976년 고희 기념 산문집 ≪激浪을 타고≫의 삽화를 모두 직접 그렸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06년 경남 합천 근처 마을 영창에서 태어났다.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상경해 고학생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했다. 1921년부터 1924년 3월까지 경성 한성중학원을 다니다가 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탄광, 토목, 철물, 문구, 제과 공장 등을 전전하면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1947년 부산으로 내려와 동래중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한다. 1949년 부산수산대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면서 197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1987년 작고했다.
이주홍문학상은 어떤 것인가?
작가 생전인 1980년 수산대학교 제자였던 동화작가 성기정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주홍아동문학상을 제정했다. 이후 이주홍문학상으로 확대해 일반문학상, 아동문학상, 평론상 등 세 개 부문으로 시상하고, 매년 5월 ‘이주홍문학제’를 개최한다. 2002년 10월 이주홍문학관을 개관했다.
맥주를 좋아해 두 사람이 90병을 마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문인이나 문단 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었다. 소설가 송원희는 이런 대화를 기억한다.
“이육사 그 사람은 참으로 점잖은 사람이었어. 과묵하고 늘 웃음 띤 낯이었어. 항일운동으로 여러 번 옥고를 치렀는데도 거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이 없었던 사람이지.”
“그 사람(이태준)은 어디로 보나 좌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 성격도 선비적이었고…. 그쪽에 가기는 갔으나 아마 그쪽에서도 살기는 매우 어려웠을 거야. 그 사람뿐 아니라 내가 보기엔 특별한 사람 몇몇 빼고는 대부분 문인들은 그저 민족주의니 뭐니 하다가 휩쓸려간 것이지.”
“그런데 그게 지금과 달랐지. 그 시대는 서로 논쟁이니 토론이니 하기는 했어도 어떤 잡지든지 구별 없이 원고만 가지고 가면 다 실어 주고 또 같이 어울려서 술도 마시고 했으니까. 친일파만 빼놓고는 일제 탄압 아래서 같이 신음하면서 민족 독립이 목적이었으니까. 해방이 되고 나서 성급하게 반공이니 뭐니를 따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문인들이 월북을 안 했을지 몰라. 카프와 민족주의 문학은 달랐으니까.”(<독야청청 향파 선생님>, ≪이주홍의 문학과 인생≫, 2001, 도서출판세한, 148~150쪽)
이주홍 연구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소설과 극문학 작품은 이주홍 문학재단이 전집으로 간행했다. 하지만 아동문학 작품은 아직까지 전집으로 간행되지 않아 안타깝다. 예비 동화작가나 후학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이주홍의 아동문학적 위상을 위해서라도 이주홍의 아동문학전집이 발간되어야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문홍이다. 동화와 희곡을 쓴다. 부산연극평론가협회 회장, 부경대학교 외래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