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변심
마리보(Marivaux)의 ≪이중의 변심(La Double inconstance)≫
변심에 대한 변심
젊은 연인이 첫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변심이다. 그러나 상대도 변심하면 어떤가? 변심과 변심이 만나면 새로운 사랑이 일어난다.
실비아제가 궁정 여자들에게 복수해 주려고 했던 것 잘 아시죠? 그런데 이제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플라미니아그럼 아가씨는 본래 복수심이 없는 분이셨군요.
실비아제가 아를르캥을 좋아했죠?
플라미니아그랬던 것 같아요.
실비아그런데 이젠 그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플라미니아그렇다고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요.
실비아크게 잘못된 일이라도 어쩌겠어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했을 땐 사랑이 저를 찾아왔던 거고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지금은 그게 가 버린 거예요. 제 뜻과 무관하게 사랑이 찾아왔다가 마찬가지로 가 버렸으니 제가 비난받을 일은 없지요.
플라미니아(첫마디는 방백으로) 잠시라도 웃지 않을 수 없군. 저도 거의 비슷한 생각입니다.
실비아(흥분해서) 거의 비슷하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완전히 동감한다고 해야지요! 그게 사실이거든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꼭 이렇게 이랬다저랬다 한다니까!
플라미니아그런데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실비아흥분하는 게 당연하지요. 진솔하게 의견을 구하는데 ‘거의 비슷하게’라고 사족을 달면 어떡해요!
플라미니아칭찬하는 의미로 농담한 걸 모르세요? 그래 아가씨가 좋아하는 분이 궁정 시종인가요?
실비아그럼 그분 말고 누가 있단 말이에요? 아직 좋아한다고 인정할 순 없지만 결국엔 그렇게 될 거예요. 항상 ‘예스’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꼬박꼬박 ‘노’라고 대답하면서 그 사람이 슬퍼하고 한탄하는 걸 보며 그의 고통을 계속 위로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잖아요? 차라리 그런 짓을 그만두는 게 낫지요.
≪이중의 변심≫, 마리보 지음, 이경의 옮김, 143∼144쪽
실비아가 플라미니아 앞에서 자신의 ‘변심’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실비아가 연인 아를르캥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궁정 시종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가 왕자로 밝혀진다.
마리보의 네 번째 희극인가?
습작 수준에 그쳤던 초기작과 달리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탈리아 극단이 40여 년간 꾸준히 공연한 결과는 어땠나?
이 작품이 거둔 성공 덕분에 이탈리아 극단 대표와 그 가족들이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는 영예를 누렸다. 코미디 프랑세즈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극단 배우들이 왕실로부터 공식 인정받기도 했다.
1764년 세 차례 공연된 뒤로 1921년까지 공연이 없었는데 그 이후는?
20세기 들어 문학 평론가를 비롯한 연극인들이 마리보 희극을 재조명하면서 ≪이중의 변심≫은 다섯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등장인물에 대한 사실적인 심리묘사가 장르를 초월해 인정받게 된 것이다.
역시 주제는 사랑의 불충실인가?
‘이중의 변심’이라는 제목에 주제를 잘 요약하고 있다. 왕자는 실비아와 결혼하고 싶어 그녀를 납치한다. 하지만 실비아는 얼굴도 모르는 왕자의 구혼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고향에 있는 연인 아를르캥 때문이다. 이때 플라미니아가 왕자를 위해 조력자로 나선다. 그녀의 계략으로 실비아와 아를르캥은 서로 변심하고 실비아는 궁정 시종에게, 아를르캥은 플라미니아에게 새로운 사랑을 느낀다. 궁정 시종은 실비아의 사랑을 확인한 뒤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밝힌다.
마리보는 ‘변심’을 어떻게 다루나?
젊은 연인이 첫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로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애에 바탕을 둔 인간 심리의 어쩔 수 없는 측면으로 받아들인다. ‘변심’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프랑스 문학은 변심을 어떻게 다루나?
코르네유의 <루아얄 광장>, 몰리에르의 <동 쥐앙> 같은 작품은 물론, 프레시오지테 경향의 소설과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리보는 정절을 지키기보다 새로운 유혹에 이끌리는 인간 본성을 사실 묘사한다. 프랑스 문학의 테마를 계승한 결과다.
궁정 풍자는 어떤 의미인가?
‘사랑에 대한 불충실함’과 함께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테마다. 몰리에르는 <인간 혐오자>에서 알세스트를 내세워 거짓된 예절과 위선이 넘치는 궁정을 고발한다. 마리보의 이 작품에서는 특정 인물이 그 역할을 독점하지 않는다. 실비아 눈에는 궁정 사람들이 지인들을 속이고, 약속을 배반하고, 사기와 거짓을 일삼는 파렴치한들로 비쳐진다. 익명의 귀족과 아를르캥이 나누는 대화에서도 궁정 귀족의 맹목적인 충성과 허울뿐인 명예 의식에 대한 풍자가 엿보인다.
실비아와 아를르캥은 궁정 생활에 어떻게 적응하나?
실비아는 궁정 여인들의 자만심과 허영, 위선을 목도하지만 자신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드레스를 입어 보면서 궁정 사치에 눈뜬다. 아를르캥 또한 타고난 식탐과 폭음 기질 때문에 궁정에서 제공하는 향락에 빠져든다. 결국에는 둘 다 궁정에서 요구하는 기대에 굴복하고 만다.
마리보는 누구인가?
보마르셰와 함께 18세기 프랑스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다. 본명은 피에르 카를레 드 샹블랭, 168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오라토리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문학에 입문했다. 1710년 파리로 상경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관심을 문학으로 돌린다. 프레시오지테 경향을 반영한 장편 연애소설 ≪호감이 주는 놀라운 효과≫를 발표한 데 이어 ≪진창에 빠진 마차≫, ≪변장한 일리아드≫ 등의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며 문필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1716년부터 집 근처에 있는 길 이름에 착안해 마리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1730년대 그를 후원했던 탕생 부인의 도움으로 경쟁자 볼테르를 물리치고 174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피선된다. 이후 몇 차례 연설문을 집필한 것을 제외하고 무대에서 공연될 만한 성공작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하고 위축된 노년을 보내다 1763년 파리에서 사망한다.
1720년 이탈리아 극단에서 공연한 <사랑과 진실>이 데뷔작인가?
그렇다. 그러나 첫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 되어 버리는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같은 해, 같은 무대에서 공연한 <사랑으로 세련되어진 아를르캥>의 성공은 이런 실패를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고무되어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비극 <한니발>을 공연했지만 기대한 호응을 얻는 데 실패하고 비극에 대한 창작 의지를 완전히 접는다. 이후 <놀라운 사랑>, <이중의 변심> 등을 성공시키며 입지를 다진다.
18세기 후반 이후 19세기까지 소외된 이유는?
작품 상당수가 이탈리아 극단에서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당대 왕실로부터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던 코메디 프랑세즈 무대가 아닌데다가 외국 배우들이 공연하는 극단에서 올린 작품이기 때문에 호의적인 평가를 끌어내기 어려웠다.
이탈리아에서 마리보는?
1726년 이후 이탈리아 극단과 코메디 프랑세즈 무대에서 번갈아 작품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작품을 이탈리아 극단에 제공했다. 마리보의 극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아를르캥’은 이탈리아 극단에서 데뷔한 그의 연극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캐릭터다.
‘아를르캥’의 정체는?
‘아를르캥’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단골로 등장하는 하인 캐릭터다. 그런 아를르캥이 마리보 작품을 통해 프랑스 무대에서도 성가를 높였다.
20세기는 마리보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평론가들은 마리보타지라 불리는 그만의 세련된 문체, 섬세한 심리묘사에 주목했다.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 시인이라 불리는 미셸 드기가 마리보 연구의 대가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경의다. 경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