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나두야 가련다
하운(何雲)은 호다. 구름처럼 흩어져 떠도는 문둥이라는 뜻이다. 시인은 평생 나환자로 천형의 삶을 산다.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형벌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산에 에워싸인 채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뉘우침”으로 “통곡한다”. 하운의 시는 처절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 고통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라서 더욱 살을 저미는 아픔이다.
≪한하운 시선≫, 한하운 지음, 고명철 엮음
1930년대는 서구 편향의 모더니즘이 대세였다. 이때 홀로 무위자연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김상용이다. 구름이 꼬여도 가지 않고, 왜 사냐건 그저 웃는다. 그야말로 안빈낙도요 단표누항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제재, 노장사상에 가까운 무위는 돌올하고 개성적인 시 세계를 이룬다. 소박하고 친근한 민요조는 한국인의 여유와 여백의 미학을 보여 준다.
≪김상용 시선≫, 김상용 지음, 유성호 엮음
박용래는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시인이었다. 바위틈에 핀 꽃 같았다. 저 홀로 한가롭게 피어 금욕적인 언어로 “삼엄하리만큼 섬세하고 치밀한” 서정미를 추구했다. 그의 시는 돋을새김한 판화를 연상시킨다. 행간에 묻힌 서러움과 정한, 고결한 시혼 때문이다. 심연으로 다가오는 행간을 읽어 내야만 박용래 시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박용래 시선≫, 박용래 지음, 이선영 엮음
거추장스러운 수사가 없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기교도 없다. 이성선의 시는 한마디로 담박하다. 시인은 아이처럼 순수한 자연을 지향하다 그것과 닮아 간다. 그리고 한 마리 애벌레가 되어 벌레가 사는 곳보다 낮고 척박한 곳에 시와 삶을 다 내려놓는다. 치장을 벗어던진 시는 깃털처럼 가볍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영혼의 무게와 우주적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성선 시선≫, 이성선 지음, 김효은 엮음
박용철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순수 서정시를 추구했다. 1930년대, 일제 식민 치하에서였다. “압 대일 어덕” 하나 없는 막막한 현실이었다. 그래도 ‘고처’에 자리한 ‘서정시의 고고한 길’을 가겠다 했다. 그렇게 조선어의 시적 가능성을 열었다. 그리고 1938년, “나 두 야 가련다”라는 시구만 남긴 채 영영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다섯이었다.
≪박용철 시선≫, 박용철 지음, 이혜진 엮음
2735호 | 2015년 9월 4일 발행
이 가을, 나두야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