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 초판본
정비석의 ≪자유부인≫
여자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여자가 화장을 할 때는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도 모습이 달라진다. 진실로 자유는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비석은 주장한다. 해방 후, 무력한 아버지가 활발한 어머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한눈에 드러난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사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는 것은, 남자들로 치면 세계 일주 유람 여행을 떠나는 이상으로 호화로운 일일른지 모른다. 일체의 가정적 구속을 떠나서, 창공에 나는 솔개미와 같이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집구석에 들어앉았을 때에는 장작이 떨어졌느니 김장을 해야겠느니 하고 잔소리 끊일 때가 없다가도, 일단 차리고 나서기만 하면 그런 걱정을 쓸은 듯이 잊어버리는 것이 여자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여자에게는 과거가 없다. 오직 눈앞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실로 행복스러운 건망증(健忘症)인 것이다. 그런 행복스러운 건망증이 있음으로 해서 어제의 악처(惡妻)가 오늘의 현부(賢婦)도 될 수 있고, 오늘의 가정부인이 내일의 매소부로 전락할 소질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거리에 나선 오선영 여사는 지극히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여자들이 외출을 위하여 화장을 할 때에는, 얼굴만을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조차도 자유라는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로 자유라는 것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여자들의 마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도대체가 화교회라는 정체불명의 사교회부터가 그런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조직체였다. 무릇, 부유하고 세도 있는 집 가정이란, 대개 안에는 침모와 식모가 있고, 밖에는 사환과 문직이가 있으므로, 주부 자신은 별로 할 일이 없다. 지극히 유한(有閑)한 것이다. 집에 앉아서는 하루해가 지리하도록 할 일이 없으므로, 자연히 밖으로 나다니자니 화교회 같은 사교 단체가 필요하게 된다.
초판본 ≪자유부인≫, 정비석 지음, 추선진 엮음, 10~11쪽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얘기 같은데 어떤 대목인가?
대학교수의 아내이며 평범한 가정주부인 오선영이 탈선의 길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모 여자전문학교 동창 모임인 ‘화교회’ 때문이라고 서술하는 대목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는 ‘화교회에 참석하느라 집을 나섰기 때문’에 오선영이 탈선한 것이라고 시사한다.
동창회 참석이 탈선과 연결되는 사회 사정은 무엇인가?
봉건적인 가치관이 많이 남아 있었던 1950년대가 작품 배경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오선영은 화교회를 통해 사회 지도층 인사의 부인들이 계 모임을 활발하게 하고, 사교춤을 배우며, 애인을 만드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에 대한 동경은 그런 삶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한다. 오선영은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경제적인 궁핍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자 마음먹는다.
오선영이 일하는 양품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나?
그녀는 남편의 허락을 얻어 파리양행이라는 양품점을 대리 경영한다. 그리고 세련된 여성이 되기 위해 옆집 대학생 신춘호에게 사교춤을 배우면서 그에게 연정을 품는다. 뿐만 아니라 양품점 주인의 남편인 한태석과 양품점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은근한 시선도 즐긴다.
외간 남자 만나는 것 자체가 문제인가?
작가는 직업상 다른 남자들과 접촉하는 것도 문제란 입장이다. 작가는 오선영이 파리양행에 취직을 하자마자 사업 수완을 발휘한답시고 손님들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서술한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작가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는 타락의 시작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직업을 가진 여성에 대한 비하는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풍조이자 작가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따른 것이다.
오선영의 남편 장태연 교수는 어떤 남자인가?
장 교수는 학자로서 사명감에 충실하며 융통성 없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변화한 사회 분위기와 달라진 가치관을 거부하는 그는 오선영과 그녀를 유혹하는 신춘호, 한태석, 이혼녀 최윤주, 당선을 위해서라면 비도덕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오병헌 국회의원, 사기꾼 백광진 등 주변 인물들과 선명히 대비된다.
장태연이 옆집 처녀에게 품은 연정은 정당한가?
장 교수는 옆집 처녀인 박은미에게 연정을 품는다. 작가는 윤리적인 인물로 대표되는 대학교수조차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한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당시 대학교수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황산덕(黃山德) 박사는 서울대에서 발행하는 ≪대학신문≫에 작가가 대학교수를 조롱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어 논쟁을 일으킨다. 황 박사는 ≪자유부인≫에 대해 “중공군 40만 명보다 더 무서운 해독을 끼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한다.
황산덕의 ‘중공군 40만명설’은 설득력이 있었는가?
작가는 장 교수의 탈선을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간다. 박은미도 모르게 연정의 마음만을 품었을 뿐이다. 그것도 아내가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생긴 마음이다. 박은미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방황을 끝내고는 다시 학생을 계도하고 연구에 매진해 사회적 존경을 받는 모범적인 교수로 되돌아온다. 그는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탈선한 아내를 기꺼이 용서하는 포용력 있는 인물로 미화된다.
장 교수를 빼면 다른 남성들을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한 까닭은?
다른 남성들은 모두 오선영의 탈선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춤을 가르쳐 준 바람둥이 신춘호, 그녀를 유혹했던 사기꾼 사업가 백광진, 오선영이 탈선하는 데 한몫한 한태석이 대표적이다. 오선영의 오빠인 오병헌은 현직 국회의원으로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재선 실패 후 수감된다.
부정적인 인물, 곧 뭇 남자들의 파멸과 회개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장태연 교수의 윤리성을 돋보이게 한다. 오선영은 “저렇게 훌륭한 남편을 몰라보았구나!” 하고 “뼈가 저리도록” 뉘우친 후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로써 작품의 권선징악적인 주제와 해피엔드의 구성이 완성된다.
오선영의 탈선과 회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는가?
당시 대중은 오선영의 탈선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귀환에서 그들 대부분이 올바르다고 믿었던 가치관이 붕괴되지 않았음에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자유부인≫은 가치관의 혼란과 자유주의 사상의 흐름 속에서도 봉건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 사회를 반영한 작품이다.
≪자유부인≫이 ‘불륜과 탈선을 다룬 대표적 작품’이라는 평가는 타당한가?
자유부인은 ‘자유’를 얻지 못했다. ≪자유부인≫은 보수적인 주제 의식에서 벗어난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서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주제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여성의 사회 진출 문제와 함께 제시한 사회적 이슈는 무엇이었나?
1950년대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전쟁과 함께 들어온 서구 문화와 봉건사회 윤리관이 충돌하고, 전통적인 공동체가 와해되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다. 또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사회 전반에 자유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전통적인 윤리관에 억압되어 온 개인의 욕망이 표출되기 시작한 시기다. 작가는 극심해진 여러 계층의 부정부패에 대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작품의 중심인물로 설정해 비판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을 주장하려 한다.
부정적 인물의 행보와 부정부패상은 어떤 모습으로 제시되는가?
백광진은 부도 수표를 뿌리고 다니며 ‘국무위원 13명 중 6명이 내 동창’이란 말로 사기를 친다. 국회의원 오병헌은 친구의 자식을 대학교에 부정입학시키겠다는 뜻을 대놓고 말한다. ‘국어학사’를 낙제한 국문과생 원효삼은 오선영에게 금품을 제공해 낙제를 면하고자 한다. 파리양행 실소유주인 한태석은 유부남이면서도 오선영에게 접근한다. 오병헌의 부인은 남편이 부정부패 혐의로 수감되자 갖고 있는 패물을 팔아 높은 사람들을 상대로 로비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화교회 회원들은 자기 남편들이 권세를 부리며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죄의식 없이 말한다.
≪자유부인≫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소문은 정말인가?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됐다. 주인공이 탈선할 무렵인 70회 이후부터 연재가 끝날 때까지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대중은 ‘교수라는 사회 지도층 인사의 부인이 벌이는 비윤리적인 행각’이라는 자극적인 주제에 관심을 보였고, 신문 판매 부수는 대폭 증가했다. ≪서울신문≫ 연재가 끝난 이후 발매된 단행본은 엄청난 호응 속에서 7만 부가 넘게 팔려 한국 출판사상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흥행 1위의 기록을 남겼다.
작가 정비석은 어떤 사람인가?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비석(飛石)’은 스승이었던 김동인이 지어 준 이름이다.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32년 일본에 있는 니혼 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1935년 시 <도회인에게>, <어린것을 잃고>와 소설 <여자>,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卒哭祭)>가 입선되었고,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城隍堂)>이 당선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다. 해방 후에는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냈고, 이후 전업 작가로 소설 창작에 매진해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자유부인≫으로 유명세를 치른 정비석은 이후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6년부터 ≪조선일보≫에 4년 간 연재한 ≪명기열전≫, 1981년부터 8년 동안 ≪한국경제신문≫에 잇달아 연재한 ≪손자병법(孫子兵法)≫, ≪초한지(楚漢志)≫, ≪김삿갓 풍류 기행≫ 등이 유명하다. 1991년 서울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추선진이다. 경희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