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끼전
우화한 세계 4. ≪장끼전≫
귀가 있어도
기러기가 물 위를 날 때 갈대를 무는 것은
장부가 근신하는 것과 같고,
천 길을 나는 봉황이 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는 것은
군자가 염치를 지키는 것과 같다.
까투리의 간곡한 설득과 애원에도
장끼는 요지부동, 제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귀가 있어도 들을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천생만물민유록(天生萬物民有祿)*하니 일포식(一飽食)도 재수라고 점점 주워 들어갈 때 난데없는 붉은 콩 한 알 덩그렇게 놓였거늘 장끼란 놈 하는 말이,
“어화 그 콩 소담하다.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이 마다하리? 내 복이니 먹어 보자.”
까투리 하는 말이,
“아직 그 콩 먹지 마소. 설상(雪上)에 유인적(有人迹)하니 수상한 자취로다. 다시금 살펴보니 입으로 훌훌 불고 비로 싹싹 쓴 자취 심히 괴이하니 제발 덕분 그 콩 먹지 마소.”
장끼란 놈 하는 말이,
“네 말이 미련하다. 이때를 의논컨대 동지섣달 설한(雪寒)이라. 첩첩이 쌓인 눈이 곳곳에 덮였으니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하고 만경(萬逕)에 인종진(人踪盡)이라.* 사람의 자취 있을쏘냐?”
까투리 하는 말이,
“사기(事機)는 그러할듯하나 간밤에 꿈을 꾸니 대불길(大不吉) 하온지라 자량처사(自量處事)* 하시오.”
장끼 소왈(笑曰),
“내 거야(去夜)에 일몽(一夢)을 얻으니 황학을 비껴 타고 하늘에 올라가 옥황께 문안하니, 나를 산림처사(山林處士) 봉(封)하시고 만석고(萬石庫)의 콩 한 섬을 상급(賞給) 하셨으니, 오늘 이 콩 하나 그 아니 반가울까?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기자감식(飢者甘食)이요, 갈자이음(渴者易飮)이라’* 했으니 주린 양을 채워보자.”
까투리 이르는 말이,
“그대 꿈 그러하나 이내 꿈 해몽하면 무비(無非) 다 흉몽(凶夢)이라. 어젯밤 이경*초(二更初)에 첫잠 들어 꿈을 꾸니 북망산(北邙山)* 음지쪽에 궂은비 흩뿌리며 청천(靑天)의 쌍무지개 졸지에 칼이 되어 자네 머리 ‘뎅겅’ 베어 내리치니 자네 죽을 흉몽이라. 제발 그 콩 먹지 마소.”
장끼란 놈 하는 말이,
“그 꿈 염려 마라. 춘당대(春塘臺)* 알성과(謁聖科)*의 문관장원(文官壯元) 참례하여, 어사화(御賜花)* 두 가지를 머리 위에 숙여 꽂고 장안(長安) 대도(大道) 상에 왕래(往來)할 꿈이로다. 과거나 힘써보세.”
까투리 또 하는 말이,
“삼경야(三更夜)에 꿈을 꾸니 천 근 들이 무쇠 가마 자네 머리 흠뻑 쓰고, 만경창파(萬頃蒼波) 깊은 물에 아주 풍덩 빠졌거늘, 나 혼자 그 물가에서 대성통곡(大聲痛哭)하여 보니, 자네 죽을 흉몽이라. 부디 그 콩 먹지 마소.”
장끼란 놈 이르는 말이,
“그 꿈은 더욱 좋다. 대명(大明)이 중흥할 때 구원병(救援兵) 청하거든 이내 몸이 대장되어 머리 위에 투구 쓰고 압록강 건너가서 중원(中原)을 평정하고 승전대장(勝戰大將) 돼 올 꿈이로다.”
까투리 하는 말이,
“그는 그렇다 하려니와, 사경(四更)에 꿈을 꾸니 노인 당상(堂上)*하고 소년이 잔치할 제 스물두 폭 구름차일(遮日) 받쳤던 서 발 장대 우지끈뚝딱 부러지며 우리 둘의 머리에 아주 흠뻑 덮쳐 보이니 답답한 일 볼 꿈이요, 오경(五更) 초에 꿈을 꾸니 낙락장송 만정(滿庭)한데 삼태성(三台星)* 태을성(太乙星)*이 은하수(銀河水)를 둘렀는데 그중의 한 점 별이 똑 떨어져 자네 앞에 내려져 뵈니 자네 장성(將星)* 그리된 듯. 삼국(三國)적 제갈무후(諸葛武侯) 오장원(五丈原)에서 운명*할 제 장성(將星) 떨어졌다 하더이다.”
장끼란 놈 하는 말이,
“그 꿈 염려 마라. 차일 덮여 보인 것은 일모청산(日暮靑山)* 오늘 밤에 화초병풍(花草屛風) 잔디 장판에 등걸로 베개 삼고, 칡잎으로 요를 깔고 갈잎으로 이불 삼아 너와 나와 치켜 덮고 이리저리 뒹굴 꿈이요, 별 떨어져 보인 것은 옛날 헌원씨(軒轅氏)* 대부인(大夫人)이 북두칠성(北斗七星) 정기(精氣) 타서 제일생남(第一生男) 하여 있고, 견우직녀성(牽牛織女星)은 칠월칠석(七月七夕) 상봉이라. 네 몸에 태기(胎氣) 있어 귀자(貴子) 낳을 꿈이로다. 그런 꿈만 많이 꾸어라.”
하니 까투리 하는 말이,
“계명시(鷄鳴時)* 꿈을 꾸니 색저고리 색치마를 이내 몸에 단장하고, 청산녹수(靑山綠水) 노닐다가 난데없는 청삽사리 입술을 악물고 와락 뛰어 달려들어 발톱으로 허위 치니 경황실색(驚惶失色)* 갈 데 없어 삼밭으로 달아날 제, 잔 삼대 쓰러지고 굵은 삼대 춤을 추며, 잘은 허리 가는 몸에 휘휘 친친 감겨 뵈니, 이내 몸 과부되어 상복(喪服) 입을 꿈이오니, 제발 덕분 먹지 마소. 부디 그 콩 먹지 마소.”
장끼란 놈 대로(大怒)하여 두 발로 이리 차고 저리 차며 하는 말이,
“화용월태(花容月態)* 저 간나위* 년 기둥서방 마다하고 타인남자(他人男子) 즐기다가, 참바* 올바 주황사로 뒷죽지 결박하여 이 거리 저 거리 종로 네거리, 북치며 조리 돌리고* 삼모장과 치도곤으로 난장(亂杖)* 맞을 꿈이로다. 그런 꿈 말 다시 마라. 앞정강이 꺾어놓을라.”
* 천생만물민유록(天生萬物民有祿): 하늘이 낸 만물에는 모두 타고난 녹이 있음.
*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하고 만경(萬逕)에 인종진(人踪盡)이라: 중국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강설(江雪)>이란 시에 ‘산에는 새도 날지 않고, 길에는 인적이 끊겼네(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라는 구절이 있다.
* 자량처사(自量處事): 스스로 헤아려 일을 처리함.
* 기자감식(飢者甘食)이요, 갈자이음(渴者易飮)이라: 주린 자 달게 먹고, 목마른 자 쉬이 마신다는 뜻.
* 이경(二更): 깊은 밤. 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초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이라 했다. 초경은 오후 7∼9시, 이경은 오후 9∼11시, 삼경은 오후 11시∼오전 1시, 사경은 오전 1∼3시, 오경은 오전 3∼5시를 말한다.
* 북망산(北邙山): 중국 하남성 낙양 북쪽의 산 이름. 역대 왕의 무덤이 많이 있는 곳이어서, 흔히 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을 이른다.
* 춘당대(春塘臺): 창경궁 후원 영화당의 앞마당. 돌로 쌓아 높은 대를 만들어 둔 곳으로 과거를 치르던 장소로 유명하다.
* 알성과(謁聖科): 임금이 문묘에 가서 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생에게 실시하여 우수한 자를 선발하던 시험. 알성시라고도 한다.
* 어사화(御賜花):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꽃. 과거에 급제하면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방방의’라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왕이 친히 참석하여 ‘홍패’라고 하는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과 ‘개’라고 하는 우산처럼 생긴 깃발, 그리고 ‘어사화’를 예물로 내렸다. 어사화란 ‘임금이 내린 꽃’이라는 뜻으로서 청색, 홍색, 황색의 조화(造花)였다. 과거 급제자는 이 어사화를 뽐내면서 일종의 합격 축하 잔치라고 할 수 있는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행했다.
* 당상(堂上): 조부모나 부모가 거하는 곳.
* 삼태성(三台星): 큰곰자리에 딸린 자미성을 지키는 별. 상태성, 중태성, 하태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태을성(太乙星): 북쪽 하늘에 있어 전쟁, 재난, 생사를 맡아 다스린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별.
* 장성(將星): 어떠한 사람에게든 각각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별.
* 삼국(三國)적 제갈무후(諸葛武侯) 오장원(五丈原)에서 운명: 촉한의 승상 제갈량(공명)은 유비가 죽은 후 안으로는 어수선한 문제들을 정리하고 밖으로는 북방 정벌을 꾀하던 중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장군 사마의(중달)와 오장원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장기전을 펼치며 대치하던 중 전쟁을 미처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제갈량은 군중에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제갈량이 죽었을 때 큰 별이 떨어져 적국에서도 제갈량의 죽음을 눈치챘다고 한다. 그러나 촉한은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 사마의를 속였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고 말한다.
* 일모청산(日暮靑山): 푸른 산에 해가 저묾.
* 헌원씨(軒轅氏): 중국 태고 시대 전설적인 삼황오제 중 한 사람. 황제라고도 한다. 신농씨 말년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창과 방패 쓰는 법을 익혀 제후들을 제압하고, 포악한 치우천왕을 물리친 후 신농씨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배와 수레를 비롯하여 문자, 음악, 역법 등 많은 문물을 만들고 제도를 확립했다고 한다.
* 계명시(鷄鳴時): 이른 새벽 닭이 울 때.
* 경황실색(驚惶失色): 놀라고 두려워 얼굴빛이 달라짐.
*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맵시를 이르는 말.
* 간나위: 간사한 사람이나 간사한 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
* 참바: 삼이나 칡 따위로 세 가닥을 지어 굵다랗게 드린 줄.
* 조리 돌리고: 죄를 지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끌고 돌아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키는 것.
* 삼모장과 치도곤으로 난장: 삼모장이나 치도곤은 죄인에게 매질을 하는 형벌에 쓰인 형구를 뜻함. 죄인을 때리는 형벌은 때리는 나무 형구에 따라 태형, 장형, 곤형으로 나뉜다. 태는 작은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 같은 형구이고, 장은 큰 가시나무로 만든 형구이다. ‘삼모장’이란 모가 세 개가 되도록 깎은 장이란 뜻이다.
태나 장보다 훨씬 길고 두꺼운 버드나무로 만든 곤으로 볼기와 허벅다리를 번갈아 치는 형벌인 곤형은 태형이나 장형과 달리 선조 이후, 즉 조선 중기 이후에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죄인에게 치명적일 수 있었으므로, 군사적인 지휘권을 가졌거나 변방 경계 임무를 맡은 지방의 수령 등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곤의 종류에는 중곤(重棍)·대곤(大棍)·중곤(中棍)·소곤(小棍)·치도곤(治盜棍) 등이 있었는데, 중곤∼소곤은 곤의 너비와 두께에 따라 사용 권한이 달랐다. 치도곤은 포도청이나 변방의 수령 등이 절도범이나 소나무 도벌범 등의 도적을 다스리거나 변방의 경계와 관련된 일을 다스릴 때 사용했다.
죄인에게 매질을 할 때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어서, 사안에 따라 형구가 정해져 있었고 볼기와 넓적다리를 때리게끔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칙을 무시한 채 죄인의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는 고문을 ‘난장’이라고 한다. 따라서 바람을 피운 여자에게 삼모장, 치도곤, 난장 등을 행한다는 본문의 서술은 꽤나 지나친 것으로서 여성의 부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와 반감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장끼전>>, 작자 미상, 최진형 편역, 7-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