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서명숙이 옮긴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정복자(Les Conquérants) >>
부조리는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은 부조리다. 허망하고 무의미하며 모순이지만 모든 운명의 운명이고 착란과 광기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말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가 나를 응시하는 순간 불빛이 다시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아까 얼핏 본 것 같은 그 기쁨을 다시 찾아보려 애쓴다. 하지만 기쁨은 간데없고 단호하지만 우정 어린 엄숙함이 드러날 따름이다.
≪정복자≫, 앙드레 말로 지음, 서명숙 옮김, 251쪽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가?
화자가 친구이자 혁명 동지인 가린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순간이다. 가린은 혁명에 승리하고 삶에 패한다.
중국 국민혁명인가?
국민당이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영국, 반혁명 세력 등과 벌인 통일 운동을 말한다.
가린은 누구인가?
광둥 국민정부의 선전부 대표다.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1925년 홍콩과 광둥 총파업을 주도한다. 병 때문에 광둥을 떠난다. 말로는 그를 정복자라고 했다.
≪정복자≫는 말로의 첫 소설인가?
1928년 작으로 앙드레 말로의 첫 소설이자 출세작이다. 출판 직후 독자와 비평가 모두 호평했고 작가의 전기적 소설로 간주했다. 말로의 체험담이라는 전설 내지 신화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가린이 말로인가?
작가의 철학적 비전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중국 혁명 연대기인가?
“이 작품은 중국 혁명에 관한 소설적 연대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발이다”라고 말로가 말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해 무엇을 고발한다는 말인가?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작품이 “본질적으로 인간과 운명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단언했다.
인간과 운명의 관계란 무엇인가?
부조리다. 그는 “가린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혁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제1부의 제목이 접근이다. 무슨 뜻인가?
가린의 초청을 받은 화자가 혁명의 사령탑인 광둥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여정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인도양, 사이공, 홍콩을 거쳐 광둥으로 향하는 화자의 지리적 접근은 동시에 작가가 가린이라는 인물을 독자에게 조금씩 접근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린이 1부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신 화자가 자신이 차례차례 만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용해 가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홍콩과 광둥의 대규모 파업처럼 그가 연루된 사건이나 그에 대한 홍콩 경찰청 보고서 사본을 통해 다각적으로 접근한다.
그의 부조리 인식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스무 살 때 낙태 사건의 용의자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 과정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경험하고 무력감과 모멸감 그리고 혐오감에 빠진다.
그의 존재와 부조리 의식은 어떻게 갈등하는가?
부조리 경험의 결과는 권력의 행사로 그를 유혹한다. 일종의 위안, 하나의 해법으로 자리 잡는다. 마침내 권력 그 자체에 집착한다.
제2부의 제목은 권력이다. 그에게 권력은 무엇인가?
정복이다. 정복과 자기 삶을 동일시한다. 그는 광둥에서 투쟁을 이끈다. 광둥 정부의 선전부를 단기간에 확고한 권력기관으로 변화시키는 수완을 발휘한다. 화자가 광둥으로 오기 전 가린에게 받은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꿈꾸었던 권력, 지금 행사하고 있는 힘”.
이 작품에서 권력과 정복은 무엇을 말하는가?
광둥 총파업이다. 총파업이 성사된 뒤에도 혁명은 시시각각 위협에 직면한다. 그때마다 가린은 정확한 판단과 단호한 행동으로 정면 대결에서 성공한다.
가린의 병은 어떤가?
계속 악화된다. 밤중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지경에 이른다. 승리의 정점에서 가린의 퇴장은 공식화된 듯 보인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의 부조리 인식은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가?
질병과 혁명, 성공과 실패와는 관계없이 부조리는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이다. 떨쳐 버리려는 모든 시도는 어설픈 흉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떤 전환이 일어나는가?
그는 여태껏 혁명을 정복의 실체로 여겼다. 혁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승리의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질서, 인간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힘, 삶의 허망함 따위와 맞서 싸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혁명에 성공한 순간에 부조리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그는 목격한다.
그는 그렇게 부조리를 정복하는가?
부조리의 정복이 아니다. 그것의 긍정과 확신이다. 인생이 무슨 값어치가 있는지 자문하던 젊은이의 시대를 끝낸다.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삶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인간으로 바뀐다.
부조리한 인생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가 보기에 운명의 부조리한 힘 앞에서 영속하는 것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흉내는 마치 전구에 새카맣게 들러붙어 윙윙거리는 하루살이들의 발버둥과 다름없다. 그런데도 “세상의 허망함에 대한 확신이건 강박관념이건 그런 게 없다면 힘을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진정한 삶’조차 있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앙드레 말로에게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
절망적 허망함이 아니다. 본질적 허망함에 대한 인식, 부조리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삶의 뿌리다.
가린은 어디로 가는가?
목적지는 의미가 없다. 그곳이 어디든 도착하기 전에 그는 죽을 것이다. 화자가 그와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순간 그의 눈에서 본 “단호하지만 우정 어린 엄숙함”은 목전의 죽음을 응시하는 인간의 시선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명숙이다. 부산대학교 불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