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석 동화선집
정원석이 짓고 김학중이 해설한 ≪정원석 동화선집≫
금정심상소학교는 잘 있을까?
정원석은 의사이고 동화작가다. 외과 개업하고부터 함흥 지방 방언을 모아 책을 묶었다. 1932년 생이다. 분단과 상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동심을 찾는다. 그의 동심은 잘 있을까?
“학생 하나 죽이는 게 인민을 위하는 거냐? 그건 무의미한 짓이야.”
“옳고 그른 것은 훗날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지금 이 역사적인 순간에 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살인뿐이야?”
나는 총을 놓고 벌렁 뒤로 자빠졌다.
“자,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상대도 풀 위에 드러눕는 기척이 났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다.”
“뭘 말이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말이다.”
“아니, 그렇게 도도하더니 갑자기 웬일이냐?”
“아까까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흔들린다.”
“그러지 말고 우리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나 실컷 하고 죽자.”
“그래, 나는 노래나 실컷 부르고 싶다.”
이윽고 나지막하게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김소월의 <산유화>란 가곡이었다. 나도 그 곡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따라 불렀다.
≪정원석 동화선집≫, <산에는 꽃 피네>, 정원석 지음, 김학중 해설, 146∼147쪽
영화에서 본 동막골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인가?
한국전쟁이다. 둘은 겨울 설원에서 적군으로 만났다. 길을 잃고 헤매다 조우해 총부리를 겨누고 말싸움을 벌인다. 죽기 전에 노래가 생각난다. <산유화>와 교가를 부르다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임을 확인한다.
노래는 무엇을 환기하는가?
동심이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다. 둘은 서로가 하나임을 확인하고 총을 거둔다. 벗으로 돌아가 서로의 무사 생존을 빈다.
당신이 이 작품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뭔가?
동심이 치유와 회복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평론가 김학중도 적시했듯이 “동심은 긍정적 정신의 원형”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우리는 동심을 모른다. 자라서 돌아볼 때 비로소 그것이 소중함을 알게 된다.
김학중은 당신 문학의 키워드로 ‘회복과 치유, 화해’를 꼽았다. 동의하는가?
동심을 회복하면 긍정 정신을 되찾게 된다. 이것은 갈등과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된다. 검은 안개를 벗어나는 길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론가는 “동심의 회복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힘, 힐링”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아동문학은 무엇인가?
긍정의 문학이요, 희망의 문학이다. 가족 앞에서 큰 소리로 읽을 수 있고 공감하는 국민 문학이다. 누구나 읽어서 마음을 씻고 용기를 얻고 평화로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어떤 동화가 좋은 동화인가?
구원이 있는 작품이 좋은 동화다. 아무리 현실을 잘 묘사하고 문학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사회 역사의 어려움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아동문학으로서 실격이다.
아동문학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재미있어야 한다. 높은 이상과 깊은 사상을 단순한 말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동화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동화에 ‘에르모사 동화’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 시절, 수없이 겪은 살상이 싫어서 동물 동화만 썼다. 환도 후에 비로소 사람을 그렸다. 가상의 이상 도시 에르모사 시민의 인생을 그릴 계획을 세웠다. ‘에르모사’는 ‘아름답다’는 뜻의 스페인 말이다. 이 연작을 ‘에르모사 동화’라 불렀다.
에르모사 연작 동화에는 어떤 작품이 포함되나?
첫 작품이 <꼬제뜨의 장화>다. 그다음 <꽃 내음이 하나 가득 차 있었다>, <두 장의 음악회 초대권>, <두 노인 이야기>로 이어져 ≪별빛 어린 강물 위에 꽃잎은 흐르고≫로 완결되었다.
동화작가의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52년 2월, 부산 피란 시절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예과 생활을 하면서 1958년 졸업하기 전까지 강소천 선생의 훈도 아래 ≪어린이 다이제스트≫와 ≪새벗≫에 동화 약 20편을 발표했다. 이후 1976년까지는 동화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1977년에야 첫 동화집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다.
의사 생활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졸업과 동시에 육군 군의로 입대, 5년 복무했다. 제대 후 서울의대 대학원에 복귀했다. 외과 수련의 과정 수료 후 1969년 파월 민간 의료 단원으로 월남에 1년간 체재했다. 국립서울병원 외과장으로 근무했다. 1972년 관악구에서 외과 의원을 개설했다. 1981년, 농촌 생활을 자원해 제천·동해를 거쳐 춘천의료원장을 지냈다. 1988년, 8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장편소설 ≪북위 38도선≫의 창작 배경은 무엇인가?
주인공 성일기는 나와 50년 지기다. 그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전기를 쓰겠다는 작자가 많더니 관심이 식자 모두 물러서 버렸다. 그러자 그는 엉뚱하게 동화작가인 내게 간청했다. 전멸한 자신의 빨치산 부대 기록을 남겨 달라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 국민이니 그들의 역사도 남겨져야 할 것이다. 당시 지하실 생활을 하던 그를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협심으로 쓰기로 했다.
빨치산 부대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
당초에 1년이면 되겠지 하고 시작했는데 자료가 너무 많았다. 정치·사회·경제에 문외한인 탓에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 해야 했고 고증도 필요했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10여 년이 흘러갔다. 2006년에 완결했다.
≪함흥 지방 방언집≫은 무슨 연유로 출판했나?
나는 1932년 함흥시에서 태어나 함흥 금정심상소학교를 다녔다. 함남중학에 입학 후 월남했다. 고향이 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다. 개업 후 틈틈이 함흥 방언을 모았다. 도움을 받아 2010년 자비로 출판했다. 호평을 받아 정식으로 출판하기로 했다. 지금도 증보 개정 중이다.
앞으로 당신이 하게 될 일은 무엇인가?
글 쓸 시간이 많지 않았다. 후회는 없다. 의사로서도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동화작가로서의 몫이 남았다. 초심으로 돌아가 밀렸던 동화와 구상한 소설을 쓸 계획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정원석이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