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커뮤니케이션
5월의 신간. 진리는 합의될 수 있는가?
방정배가 쓴 <<진리와 커뮤니케이션>>
소통 합리와 목적 합리의 별거
진리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고 과정이며 결과다. 주체는 인간이므로 목적은 다양하고 과정은 알 수 없다. 소통의 순수와 목적의 욕망이 충돌한다. 현실은 별거를 명령한다.
진리의 소재지가 바로 언어이고 그 진리를 만들어 내는 모태가 커뮤니케이션 행위와 그 담론임이 밝혀질 수 있다. 즉 진리는 커뮤니케이션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진리와 커뮤니케이션>>, vii쪽.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진리의 소재는 어디인가?
전통적으로 진리 규명과 해석은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문제였다. 지금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진리 이론 선상에서 모색된다. 진리 문제가 인간 소통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진리와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관계인가?
진리는 목적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수단이다. 목적과 수단이 분리될 수 없듯이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진리가 규명, 분석, 인식된다고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은 언어다. 언어로 커뮤니케이션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소통 합리적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진리가 생산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진리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진리란 무엇인가?
학자에게 진리는 학문의 목표이고, 종교인에게 진리는 구원이고 깨달음이다.
다시 묻겠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면 우선 참과 거짓, 지와 무지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진리와 거짓의 충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진리와 거짓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의견과 거짓의 주장이 대결하고 쟁투한다.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파 소피스트들의 대결이나, 지동설과 천동설 주장자들의 대결과 논쟁이 그 첨예한 실례다. 이 결투에서 의견 주장자들의 숫자의 과다에 의해 그 성패가 가려졌다는 특징이 있다. 즉, 진리 의견은 그 숫자가 성패를 가름하지만 진리 자체는 숫자에 의해 가름되지 아니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지금의 진리는 다른가?
소크라테스적 진리는 앎과 모름에 의해 가려지는 진리다. 지는 참이고 무지는 거짓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는 있고 없음에 의해 가려진다. 있는 것은 참이고 없는 것은 거짓이다. 오늘날의 진리는 앎과 모름, 있음과 없음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진리는 만들어지기도 하고 파기되기도 한다.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는 진리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아레오파지티카는 진리와 거짓을 가리는 법정을 상징한다. 밀턴은 자기 책 이름 ≪아레오파지티카≫를 상징으로 사용했는데, 의견의 자유 시장이 진과 위의 판결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진리 의견과 거짓 의견이 자유 시장에서 대결하면 진리가 채택되고 거짓은 패퇴한다는 것이다. 의견 시장에서 자유만 보장되면 진리는 필연적으로 이긴다는 것이다.
진리 자동 조정 원리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참이든 거짓이든 모든 의견이 시장에 제출될 수 있도록 의견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밀턴의 의견자유논리는 언론 표현의 자유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널리즘에서 진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저널리즘의 진실 추구와 전달은 언론 윤리의 제1덕목이다. 저널리즘적 진리는 팩트와 사실 자체이고 이것은 객관성 사실성 정확성이 내용적 특성이다.
저널리즘의 진리 추구 방법은 무엇인가?
저널리스트는 팩트 파인딩, 취재, 전달에 있어 개인 의견이나 감정 개입, 주관적 해석을 첨가하지 말고 날것 그대로를 수용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한마디로, 저널리스트 개인적 견해가 뉴스 기사에 개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저널리즘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고 독자와 시청자에게 봉사하는 길이다.
하버마스의 진리는 무엇인가?
하버마스의 화용론적 진리는 존재하는(being) 진리가 아니고, 만들어지는 형성론적 진리다. 여기 혹은 거기 있는 전통적 의미의 대응론적 존재론적 진리가 하버마스에 의해 패러다임 전환이 도래한 것이다.
기존의 진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의 진리 합의 이론이란 진리는 이성적 인간에 의해 합의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이론이다.
진리 합의 이론은 실현될 수 있는가?
담론으로 진리를 생성하려 할 때 문제는 사회 조건이다. 자본주의 사회 조건에서 진리를 담론이 구성해 내기는 매우 지난하다.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담론 구성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담론에 참여하는 커뮤니케이터들이 소통 합리적으로 언행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목적 합리적으로 행위하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소통 합리와 목적 합리의 충돌인가?
사람이 현실에서 목적 합리적으로 언행하지 않으면 손해와 불이익이 온다. 이것을 감수해야 소통 합리적 언행이 가능하다.
담론이 진리인가?
합리적 담론 자체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진리를 생산하는 수단이고 진리의 모태(母胎)다.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학문의 진리는 증명되고 인식되는 존재자이고 언어 구조에 거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진리는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언어 구조를 떠나 있다. 신비한 마음이란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양의 진리는 다른가?
동양의 진리는 전통적으로 도(道)로 이해됐고, 종교적 차원에서 혹은 심론(心論)에서 추구되는 주관적 진리다. 선가(仙家)에서의 타오(道), 불가에서의 불도(佛道), 유교에서의 유도(儒道)가 그것이다. 서양의 진리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으로 파악되는 객관적 진리다. 과학적 진리가 그 대표 실례다.
이 책 <<진리와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을 말하나?
진리는 학문적 종교적 사회적 층위에서 인식되고 각성된다. 진리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요인과 얼마나 깊이 관계 맺고 있는지 해설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방정배다. 성균관대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