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풍경
박태원의 ≪천변풍경≫
청계천은 흐른다
김 첨지는 천변에 빨래터를 만들고 사용료를 받는다. 누군가가 백오십 환으로 매도를 제안하자 거드름을 피운다. 청계천은 김 첨지의 생활수단이자 사업 기회이고 수많은 동네 아낙의 공론장이었으며 일제 당국의 도시개발 대상지였다. 박태원에게 청계천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인간이었다.
“그 이가 샘터 팔지 않겠냐구, 그런 말 헙띠다.”
“샘털, 팔어?”
“응, 이편서 의향만 있다면, 자기가 넹겨 맡어 허겠답띠다… 일백오십 환까진 내겠다구….”
“뭐, 일백오십 환? 흥! 어림두 없이…. 이게 이래 뵈두 으떤 건데, 단둔 일백오십 환에 내노라는 게야? 그저 가만이 앉어만 있어두 실없이 먹구는 사는 걸….”
“허지만, 일백오십 환이면 괜찮지 않우? 사실 빨래래야 여름 한철이구, 더구나 인제 장마나 지면 틀려먹는 게구….”
“흥! 아니, 여름 한철이라니, 그럼 봄 가알 겨울엔 빨랠 안 해 입는단 말인가? 장마가 지면 그대루 개천이 송두리채 떠나간단 말인가? 웨 어림두 없이 이러는 거야?”
“허지만, 개천을 덮는단 말두 있지 않우? 허니, 아주 이번에 작자가 난 김에….”
“아—니, 이 개천을 덮어? 무슨 수루 이 넓은 개천을 덮어? …그러지 말구 바루 하눌에 올러가서 별을 따 오라지.”
“허지만 일백오십 환이면….”
“일백오십 환커녕—.”
하고 김 첨지는 길바닥에다 침을 퇴 뱉고,
“곱절을 해서 삼백 환이래두 어림없다.”
“삼백 환은, 무슨, 흐, 흐…. 이까진 샘터 하나에 삼백 환 낼 사람이 어딨우?”
“없으면 그만이지. 누가 판다나? 보긴 이래두 버리가 으떻다구….”
조금 전에 칠성 아범하고 이야기할 때와는 아주 딴판으로, 김 첨지의 기세가 바루 장하다. 용돌이는 더 권하기를 단렴하고, 광교 편으로 눈을 주고, 생각난 듯이 그편으로 걸어갔다. 점룡이에게로 가서 아−스꾸리라도 한 곱보 얻어먹기 전에는 참말 더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초판본 ≪천변풍경≫, 박태원 지음, 김종회 엮음, 194~195쪽
‘샘터를 판다’는데 우물이나 약수터를 매매했나?
작품 배경은 일제 강점기 청계천이다. 작품에 따르면 청계천의 일부 구간에 빨래하기 좋은 시설을 약간 해 두고 세금을 당국에 내면 유료 빨래터, 즉 샘터 운영이 가능했다. 타인에게 팔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샘터 매매 제안 금액 150환은 어느 정도의 금액인가?
딱 부러지게 비교하기 어렵다. 참고로 동시대에 나온 심훈의 ≪상록수≫에서 농업전문학교 학생인 동혁은 ‘내가 졸업하면 취직해서 월급 40~50원 받을 터’라고 말한다. ‘원’과 ‘환’은 둘 다 ‘조선은행권’을 가리킨다. 장사 잘되는 터전의 매매가가 여느 회사원의 3개월치 월급 정도다. 그만큼 김 첨지는 소박한 장사를 하는 서민 자영업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소박한 샘터 사업마저도 ‘벌이가 괜찮다’고 말하는 김 첨지의 대사에서 그의 경제적 환경을 알 수 있다.
‘개천을 덮는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청계천 복개는 1950년대에 시작된 것 아닌가?
1930년대에 일본 당국자들도 복개를 고려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 첨지는 복개가 실제로 이뤄질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또 샘터 장사가 괜찮기 때문에 복개 공사를 상상하기도 싫었으리라. 일본 당국자들의 생각은 해방 후 1950년대부터 2005년까지 실현됐다.
≪천변풍경≫에서 샘터란 어떤 곳인가?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하며 각종 정보와 소문을 교환하는 장소다. 누구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 어느 집이 이사 갔다, 누구네 아들이 연애를 한다 등등. 독자는 작품에서 샘터가 나오는 대목만 보면 적잖은 작중 인물의 행동거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천변풍경≫은 소설의 분량을 고려할 때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박태원은 ‘천변’을 중심으로 그곳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복잡다기한 생활상들을 그리고자 했다. 많은 인물들 이야기를 한 권으로 소화할 정도로 최고도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기법이 발휘된 작품이다. 2월 초부터 다음 해 정월 말까지가 시간 배경으로 50개 절에 걸쳐 등장인물 30여 명의 이야기를 그렸다. 식민지 도시 경성을 사는 조선인들의 삶과 도시의 음영을 총체적으로 보여 준다.
인용된 샘터 대목에서 복개 공사를 이야기하는 소설의 의도는 무엇인가?
근대 도시의 보편적 삶과 대비되는 식민지 도시 경성의 특수한 삶, 즉 청계천변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샘터 운영이라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사업 이야기에 식민지배자의 공사 계획이 언급된 데에서 반성적 의식과 윤리적 자각이 두드러져 보인다. 소박한 생활 속에도 식민지적 상황이 들어 있음을 성찰하게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샘터의 아낙네들과 또 어떤 사람들인가?
이발소 소년 재봉이다. 재봉이는 청계천 주변 인물들의 각종 근황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이발소 창가에서 천변을 바라보며 여러 인물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천변 관찰에서 재봉이의 눈은 무엇을 보는가?
박태원은 재봉이의 시점을 통해 ‘카메라 아이(camera eye)’라는 객관적 서술 기법을 꾀한다. 즉 재봉이의 눈을 통해 경성 청계천 주변 식민지적 근대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윤리적 인식을 소설 형식으로 구현했다.
박태원은 ‘구인회’ 멤버다. 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구인회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반기를 들며 모인 예술 모임이기는 하다. 그러나 박태원은 ≪천변풍경≫을 쓰면서 계급이나 이념, 예술 이데올로기로 그가 보는 것을 재단하지 않았다. 선과 악, 미와 추의 선험적 판단을 초월해 청계천변에서 사는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애환을 그 자체로 긍정한 것이다. 신산한 삶을 사는 인물들의 애달픈 이야기를 담았음에도 ≪천변풍경≫을 지배하는 전체적인 주조음이 명랑성인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작가 박태원의 출생 배경은 어떠했는가?
1910년 1월 17일, 음력으로는 1909년 12월 7일에 서울 수중박골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용환(朴容桓)과 어머니 남양(南陽) 홍씨(洪氏)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중박골은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이며 당시의 주소로는 경성부(京城府) 다옥정(茶屋町) 7번지다.
문학 입문 과정은 어떤가?
1922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재학 시절 ≪동명≫ 33호에 작문 <달맞이>를 싣게 된다. 18세가 되던 1925년 3월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실리고, 그 밖에도 ≪동아일보≫, ≪신생≫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이듬해 경성제일고보를 휴학하고, 의사였던 숙부 박용남과 교사였던 고모 박용일의 주선으로 춘원 이광수에게 개인적으로 문학 지도를 받았다. 1929년에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이 시기에 영화·미술 등과 모더니즘 문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30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다.
일본 유학에서 귀국 후 그의 행로는 어디로 향했는가?
≪신생≫ 1930년 10월호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1933년에는 구인회에 가입해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4년 한약국을 경영하던 김중하의 무남독녀로 보통학교 교사이던 김정애와 결혼했다. 1938년에 장편소설 ≪천변풍경≫ 및 단편소설집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출간했다.
해방 정국에서 박태원의 움직임은?
1946년에 남로당 계열 문학 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직을 맡았으나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해 전향성명서에 서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정인택, 이용악 등을 따라 가족을 남기고 단신 월북했다. 1953년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나,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하면서 창작 금지 조처를 받았다.
숙청당했다면, 더 이상의 창작은 없었단 말인가?
운 좋게도 1960년에 창작 금지 조처가 풀려 작가로 복귀했다. 아마도 작가로서 정치성향이 덜하고 또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귀 후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뇨병에 따른 안질환으로 실명하고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되는 등 시련을 겪는 가운데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가 박태원의 구술을 받아 적어 1977년과 1980년에 ≪갑오농민전쟁≫ 1, 2부를 발표했다. 이후 1986년 7월 10일에 박태원이 사망한 후에는 권영희가 정리, 집필해 ≪갑오농민전쟁≫ 3부를 완성했다.
친일 문제와 관련, 일제 선전에 앞장섰나?
1942년에 일본 군국주의를 미화한 ≪군국의 어머니≫라는 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소극적 협력’으로 불린다. 친일 작품은 일화 모음집인 ≪군국의 어머니≫ 외에 ≪조광≫과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각각 한 편씩 있어, 총 3편이 밝혀졌다.
당신은 누군가?
김종회다. 경희대 국어국문과 교수이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