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모윤숙 시선
한국시, 여성 시인 신간 ≪초판본 모윤숙 시선≫
아, 조선의 딸
모윤숙은 조선의 딸이 되고자 검은 머리 풀어 허리에 매고 불 꺼진 산하로 달려간다. 불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길 잃은 소녀는 노예가 되었다. 조선이 해방되자 노예도 해방되었고 유엔에 달려가 대한민국 합법정부 획득의 건을 성사한다. 항일과 친일이 충돌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의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검은 머리 풀어
임 계신 곳 향하여
이 몸이 갑니다.
검은 머리 풀어 허리에 매고
불 꺼진 조선의 제단에
횃불 켜 놓으러 달려갑니다.
≪초판본 모윤숙 시선≫, 모윤숙 지음, 김진희 엮음, 27쪽.
모윤숙의 대표작으로 이 시를 꼽는 이유는?
초기 시, 그중에서도 특히 <검은 머리 풀어>는 다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지만, 당시 모윤숙이 가슴에 품었던 ‘자아’와 ‘여성’, ‘민족의 현실’ 등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긴 검은 머리’가 환기하는 조선 전통 여성의 이미지가 시의 후반에서는 불 꺼진 제단을 향해 횃불을 들고 달려가는 여전사의 형상으로 재현되고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펜클럽을 창립한 문화 활동가이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가다.
어떤 시인이었나?
주로 남성 시인의 영역이었던 민족, 국가 담론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려 한 여성 시인이다.
시의 출발은?
1931년 잡지 ≪동광≫에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이화여전 교지 ≪이화(梨花)≫를 창간해 시와 소설, 논설을 많이 발표했다.
작품 경향은?
민족주의 성향을 보인다. 1930년대 초에는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과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민을 드러냈다.
문단의 평가는?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하자, ‘조선이 가진 하나뿐인 여류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노천명과 비교하면?
김용직은 노천명이 내향적 시인이라면 모윤숙은 외발형(外發型) 시인이라고 평했다. 그만큼 문단 활동 역시 외향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문단 활동과 인간관계는?
초창기 이광수가 ‘영운’이라는 호를 지어 줄 정도로 친했다. 1930년대 초반의 해외문학파 동인들과도 가까웠다.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이헌구, 김광섭, 최정희 등과 교류했다. 해방 이후에는 김동리, 조연현 등 당대 유명한 문사들과 문예지를 창간했다.
해방 이후 민족주의가 반공주의와 결합하는 과정은?
해방 조국의 민족 부활을 염원하는 시편이나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는 작품을 발표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주요 주제는 뭔가?
민족과 국가다.
친일 행적이 보이는데?
1941년부터 신문 등에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작품을 게재했다.
친일과 국가와 민족은 어떤 관계인가?
그래서 그의 친일 행적이 더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모윤숙의 활동을 모두 ‘친일’이라는 범주 안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어떤 재평가가 필요한가?
시인의 작품 세계를 좀더 정교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전체 작품을 소극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기시에서 보여 준 여성 의식에 대한 자각과 민족 현실에 대한 고민과 울분의 진정성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진정성인가?
≪빛나는 지역≫에 실린 <조선의 딸>, <검은 머리 풀어>에는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민족 현실 타개를 위한 적극적 의지가 표출된다. <옥비녀>는 임이 주신 옥비녀를 민족 부활의 상징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삼팔선의 밤>은 민족 화합과 번영의 소망을 담았다. 논개와 김시민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장시 <논개>, 선덕여왕과 백제 도공 아비지의 이야기를 다룬 <황룡사 구층탑> 역시 민족 위기와 극복의 서사를 통해 국가적 민족주의를 재현하고 있다.
정치 활동은?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갔다. 대한민국이 합법 국가로 승인받는 데 기여했다.
정치 태도는 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하는 이념은 작품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민족과 국가를 구원하는 개인의 의지와 희생을 재현한다.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모윤숙의 작품에 주요하게 나타나는 인식이다. 그런데 여성의 자각은 늘 민족 현실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연결되어 있다. 초기작에는 민족 현실의 구원과 관련한 여성 삶에 대한 성찰이 많이 나타난다.
민족 구원과 여성의 삶은 어떻게 연결되나?
민족이나 국가에 여성 주체가 포획된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모든 것을 허여하는 여성 주인공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한국 여성 시인 가운데 그의 위치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여성 시인은 주로 내면의 서정을 노래하는 문인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모윤숙은 그런 획일적인 평가에서 벗어난다.
예를 들면?
노천명이 <자화상>이나 <사슴>에서 섬세한 톤으로 고고한 내면 의식에 집중하고 있는 데 비해 모윤숙은 당당한 목소리로 ‘조선의 딸’이 되겠다고 외친다.
당신은 누군가?
김진희다.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HK교수다. 식민지 시대 한국 근대문학의 젠더, 근대성, 탈식민성, 번역과 비교문학이 연구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