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고정희 시선
페미니즘, 여성주의, 기독교문학, 민중민족문학, 한국시 신간 <<초판본 고정희 시선>>
여성과 민중, 아픔의 같은 이름.
겨울 숲에 눈이 내리는데, 힘이 끝난 폐차는 철길에 누워있는데, 폭설주의보를 따라 대륙에서는 찬 바람이 불어오는데,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모닥불 지펴놓고 둥글게 깍지낀 손을 놓지 않는다.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며 자기 몫의 봄소식을 간직하는 민중과 여성, 그들의 발과 입으로 살았던 한 시인은 지금 어디서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있을까?
땅의 사람들 1
-서시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 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 낀 사람들의 등 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초판본 고정희 시선≫, 고정희 지음, 이은정 엮음, 125∼126쪽
어떤 시인가?
읽을 때마다 새것 같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독자를 아프게 하고 새롭게 깨운다. 이 시가 그렇다.
고정희는 누구인가?
이 땅의 불의와 불평등에 가장 예민했던 시인이자 누구보다 뜨겁고 단단했던 실천가다.
키워드는?
여성·민중·현실, 다시 말해 ‘여성민중주의적 현실주의’, 그리고 기독교다.
삶과 시는 어떻게 만나는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한다. 정치 경제적으로 군부 독재와 자본이 장악했던 시간이고, 사회 문화적으로 현실을 향한 실천 태도가 절실하던 시기다.
그곳에서 그의 위치는?
민족민중문학사에 고정희의 시가 있었다. 한순간도 현실과 시대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현실 의식은 어디서 비롯되었나?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에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익혔다. 그곳에서 민중에 대한 시선과 문학의 뿌리를 얻었다.
시는 어떻게 말하나?
첫 시집의 첫 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는 자기 몫의 삶과 노동과 ‘한 줄의 시(詩)’를 위해 포도주처럼 붉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픈 심지 돋우며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으로 시작된다. 수틀이 아니라 ‘술틀’에서 시작된 의외의 선언이기도 하고, 새벽에 홀로 깨어나 술틀 밟는 소리를 적막과 바람 속에서도 어느 누군가는 홀연히 일어나 앉아 들어 주리라는 확신의 언어이기도 하다.
작법은?
진양조, 휘모리 장단을 탐구하고 강행해 성취를 이루었다. 민중 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 형식이다.
광주민주항쟁은 그에게 어떤 것이었나?
“미증유의 송장 사태”였다.
시의 반응은?
통곡과 신열 오른 주술 언어로 시대의 불감증과 무자비를 뒤흔들었다.
주술 언어란 무엇을 말하는가?
추도문과 별사의 제의 언어, 남도 가락과 민요의 생래적인 율동, 씻김굿과 마당굿시의 언어다.
전통 가락의 당대 접목인가?
민중의 고유 언어를 찾아 판을 벌였다. 전쟁과 식민지와 파시즘과 항쟁, 그 가운데 사라져 간 민중의 넋을 애도했다. 그들의 말을 간절하게 불러왔다.
기독교 정서와 모순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아벨’과 ‘히브리전서’와 ‘골고다 언덕’과 ‘예수’와 ‘하나님’ 등 종교적 배음(背音)은 굿시와 서간체와 제문과 전통적인 가락의 형식들과 전연 배리되지 않았다. 그에게 민중 정서와 역사 인식과 여성주의가 자각과 사상과 성찰로 형성된 것이라면, 기독교는 생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페미니스트였나?
초기에는 민중 억압 구조와 시대 의식에 민감했던 것에 비해 여성 문제를 그다지 구체화하지 못했다. 여성 억압이 당대 이데올로기에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체험을 관통해 오면서 여성에 대한 의식과 페미니스트적 구체성이 민중 억압의 구조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체득했다.
페미니스트 성장의 계기는?
<또하나의 문화> 동인과 <여성신문> 주간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 강력한 체험과 의식화 과정을 겪으며 여성 문제에 대해 단호하고 깊은 울림을 남기는 시를 쓰게 된다. 이후 한국 시에서 여성주의 영토는 한층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
시는 여성주의를 어떻게 실현하나?
여성사의 현재성, 근현대사의 폭력성, 아시아 삶의 식민성을 관통하면서 현장의 언어로 시를 썼다. 식민성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과 수난사를 현재로 다시 불러와 남성 중심의 여성 신화를 부수고 새로운 여성사 쓰기를 시도했으며, 이 인식을 더 확장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야합을 탈식민주의적 여성주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판했다.
탁상공론 아닌가?
그의 시 못지않게 놀라운 것이 실천적 태도다. 그는 책상물림의 시인이 아니라 늘 현장 속에서 분주했던 글 쓰는 노동자 시인이었다. 운동가이자 사제로서 여성법률단체와 여성문화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자신의 지식과 의식을 고군분투하며 실천했다.
이념이 예술성을 저해하지는 않나?
문학이란 이념과 예술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결합해 공존하는 것이다. 일부 시는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기도 하지만, 그의 시는 갱신을 거듭하며 늘 견고한 자세로 이념과 예술성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노력했다.
지금도 유의미한가?
고정희 시인이 앓았던 여성과 민중과 현실은 여전히 앓고 있다. 그 환부를 잊지 않고 직시하기 위해, 그가 치유하려 했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현실을 이겨 나갈 용기와 슬픔과 결기와 언어를 그의 시에서 얻기 위해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은정이다. 한신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