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관식 시선
남승원이 엮은 ≪초판본 김관식 시선≫
대한민국 김관식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명함은 간단했다. 대한민국 김관식. 다른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해 앉았지만 그가 본 것이 먼 산은 아니었다. 장거리 장삼이사가 숲을 이룬 세상이었다.
居山好 II
오늘, 北窓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山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太古로부터 푸르러 온 山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壽하는데다가
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山.
마음이 본시 山을 사랑해
평생 山을 보고 山을 배우네.
그 품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山.
네 품이 내 고향인 그리운 山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山 내음새
山에서도 오히려 山을 그리며
꿈같은 山精氣를 그리며 산다.
≪초판본 김관식 시선≫, 남승원 엮음, 40쪽
시인이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무엇인가?
김관식 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거산호(居山好)> 두 번째 시다. <거산호> 두 편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산’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세속 공간인 ‘장거리’를 등지고 앉아 ‘산’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산’이 현실과 대립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전통 가치를 탐색하고 형상한 그의 태도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향교 제관이었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과 유학을 배웠다. 민족 얼을 강조한 정인보에게 배우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해방 이후에는 오세창에게 서(書)를, 최남선에게 동양학을 배웠다.
김관식의 산은 서정주나 김영랑의 산과 무엇이 다른가?
“山에서도 오히려 山을 그리며” 산다는 김관식에게 ‘산’은 현실 모순을 지양하는 수행 공간이다. 초월해 존재하지 않고 현실에 바탕한 공간으로서 ‘산’을 바라본다.
전통 가치와 현실 모순은 그의 내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일되는가?
유례없는 비극이 진행되던 1950년대에 김관식은 비극이 없는 이상향을 꿈꾸면서도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이상 공간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이상향의 모습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구체적인 현실과 결부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의 ‘신라’는 이상과 현실이 통일되는 시공간인가?
김관식은 ‘신라’라는 민족적, 지역적 특수성 안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恨)이란 놈을 잘 잡아 처리해야 한다’고 썼다.
작품에는 신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신라소묘>에서 ‘신라’는 해와 같이 빛나던 시절로, 눈이 멀까 눈을 뜨지 못할 만큼 밝은 세계인 동시에 “옹곳싹이 뾰조록이 돋으며” “금이 간 틈서리에 잠깨어 흙을 털고 부스스 일어나는” 한 마리 땅벌레가 있는 곳이다. 이상향이자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시적 공간으로 ‘신라’를 내세운 것이다.
신라에 관한 탐색은 거기서 끝인가?
신라 효자 손순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효자전>, 망부석 설화를 바탕으로 한 <석상의 노래> 정도가 있다. <달에 關한 이야기>에서는 ‘길쌈내기’와 더불어 ‘화려한 잔치’가 벌어지던 신라와 당시 시인이 머물고 있었던 ‘자하문 밖 골짜기’를 ‘달빛’ 아래 그대로 겹쳐 보여 준다.
어쩌다 그는 신라를 ‘해와 같이 恍惚이 光明하던 時節’로 본 것인가?
자유분방하고 풍성, 윤택한 그리스 정신을 만날 수 있는 우리 역사의 시공간을 욕망했다. 그것은 상대(上代) 신라에서 찾아졌다. 김관식은 그리스 정신과 신라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려 애썼다.
김관식은 왜 시를 썼는가?
≪김관식 시선≫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동양인이다. (…) 우리가 솔선해서 서양인이 핥아 버리고 지내간 渣滓糟粕을 다시 씹을 맛이야 없지 않겠는가. (…) 그리하여 나의 시적 실존의 세계가 마침내 형이상적 종교의 경지에까지 비상하기를 스스로 기대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시 창작의 근원을 서양의 것과는 구별되는 지점에서 찾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동양인이 공유하는 정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고민’이 바로 시를 창작하는 이유이자 목표라는 말이다.
시를 김영랑에게 배웠나?
강경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 그에게 현대시를 배웠다. 이때 시 창작의 뜻을 세웠다.
첫 시집 ≪낙화집≫은 1952년에 출간됐다. 고등학생 때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2년에 첫 시집 ≪낙화집≫을 출간했다. 등단도 하기 전에 시집을 발간한 셈인데, 스승인 김영랑 시인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김영랑의 권두시와 조지훈의 서문을 실었는데, 전쟁 중에도 서문을 얻어서까지 시집을 간행한 사실이 시 창작에 대한 의지가 컸던 것을 방증한다.
등단은 서정주의 추천이었나?
첫 시집을 출간하고 3년 만인 1955년, 서정주 추천으로 시 세 편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대학을 그만두고 서정주를 찾아다니며 시 창작에 몰두하던 1953년 무렵에 김관식은 서정주의 처제를 만나 한눈에 반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음독자살까지 시도한 끝에 1954년 최남선 주례로 결혼식을 올려 서정주와는 동서지간이 된다. 하지만 서정주의 면전에서 ‘친일파 악질 시인’이라고 비난한 이후로 연을 끊어 버렸다.
천상병은 <金冠植의 入棺>에서 그를 어떻게 평했나?
“한다는 일이/ 가슴에서는 숱한 구슬./ 입에서는 독한 먼지./ 터지게 吐해” 놓았다고 김관식을 회상했다. 천상병은 ‘점잖은 친구들’에게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 다오./ 金冠植의 가을바람 이는 이 入棺을”이라고 당부하며 시를 마친다.
정치도 했나?
‘나라가 위급할 때 시인이라고 별유천지에서 희희낙락할 수 없다’고 출마의 변을 내놓았다. 1960년 4·19 직후였다. 서울 용산 갑구 민의원 선거에서 장면(張勉)을 상대했다. 고향 재산을 모두 털어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예상대로 낙선했다.
낙선한 뒤 짓고 살았던 ‘육모정’은 어떤 곳인가?
지금의 홍은동 부근 산비탈 국유지를 무단 점거한 뒤, 시청 철거반에 맞서 판자촌을 만들고 ‘육모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문인들을 불러와 살게 하고, 고아, 부랑자들을 모아 문학을 가르쳤다. 세상에 절망해 시를 접고 고향에서 영어 강사를 하던 신경림을 불러들여 다시 시를 쓰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황명걸, 조태일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삶은 어떻게 마감했나?
꼿꼿한 선비 정신, 오만과 기행, 가난과 육체의 고통을 세상에 남기고 1970년에 서른여섯에 돌아갔다. 고향 유택과 모교인 강경상고 교정, 대전 보문산 공원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남승원이다. 2010년 ≪서울신문≫ 평론 부문에 당선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