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달진 시선
한국 현대 시 신간 <<초판본 김달진 시선>>
봄날, 우주 느낌
거기 있었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니다. 보일 수 있었으나 의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그것은 없는 것이 된다. 봄에는 꽃이 핀다. 질 때까지 의식하지 못하면 그곳에 꽃은 있었을까? 바쁜 마음에 꽃이 들어설 자리는 있었을까? 김달진은 씬냉이, 곧 씀바귀의 꽃을 본다. 봄을 본 것이고 우주를 본 것이다. 자신은 비웠으므로 이미 그곳에 없다.
씬냉이꽃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新綠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초판본 김달진 시선≫, 김달진 지음, 여태천 엮음, 103쪽.
무엇을 썼나?
시인은 혼자서 뜰을 거닐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씬냉이꽃을 본다. 시선은 단순하지 않다. 감추어진 자연의 섭리를, 우주의 질서를, 씬냉이꽃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는 우주 질서에서 뭘 보았는가?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조화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추구했다. 무위자연이다.
김달진은 어떤 사람인가?
노장의 무위자연과 불교적 사유에 기반을 둔 시 세계를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지킨 시인이다. 불경과 동양 고전의 번역을 통해 얻은 종교적 사유를 평생 지속한 학자이기도 하다. 모교인 창원의 계광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1929년, ≪문예공론≫ 7월호에 양주동의 추천으로 <잡영수곡(雜詠數曲)>이 실렸다.
우주의식이라는 평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김동리는 <월하 시의 자연과 우주의식>이라는 글에서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의 자연정취를 거기 어울리는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그의 시 세계에서 굳이 어떤 의미를 붙인다면 그것을 나는 우주의식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우주의식은 세계를 어떻게 의식하나?
맑고 순연한 서정적 세계다. 동양적 사유를 미학의 근간으로 삼아 자연 형상을 그렸다.
승려가 된 사연은?
민족의 현실 앞에 절망하던 1933년의 어느 날 밤, 찢어진 벽지 사이의 초벌 신문지에서 우연히 ‘불(佛)’ 자를 발견하고 입산을 결심했다. 이듬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김운악 스님을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입산에 대한 김달진 자신의 해석은?
≪산거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원래 산을 좋아했다. 이것이 입산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스님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칼은 구렁이같이 흉물스러운 내 자신의 집착성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나 싶다. 장삼을 입고 합장하였을 때, 내심의 정제에서 느껴지는 화평한 심정-이것은 높고 아름다운 덕인 양, 나를 황홀한 경지로 이끄는 듯하였다.”
문학은 계속되었나?
1935년에는 시 전문지 ≪시원(詩苑)≫ 동인으로 참가했고, 다음 해에는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참가해 11월 창간호에 <황혼>을 발표했다. 1938년에는 <샘물>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작품 활동을 활발히 이어 갔다. 관념이나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서정 세계를 담은 첫 시집 ≪청시(靑柿)≫를 1940년에 발간했다.
고전과 불경 번역에 공을 쏟은 시기는 언제였는가?
1957년 창원 남면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고문진보(古文眞寶)≫를, 1962년 동양불교문화연구원장을 지내면서 ≪한산시(寒山詩)≫를 번역했다. 이후 20여 년간 ≪장자(莊子)≫와 ≪법구경(法句經)≫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옮겼다.
다시 시로 돌아온 계기는?
1979년 동인지 ≪죽순≫ 복간호에 <벌레>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벌레>는 어떤 시인가?
절대 진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불교와 시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1983년과 1984년에 잇따라 출간한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와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에도 무위자연의 참의미와 화엄 우주가 나타난다.
무위자연이 현대에 통할 수 있는 콘셉트일까?
그의 시가 보여 주는 무위자연의 세계와 그가 스스로 지켜 온 은자의 삶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빛난다. 현대에 정신주의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문단의 평가가 궁금하다.
최동호는 <김달진 시와 무위자연의 시학>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김달진의 시사적 의의는 60여 년의 시작 생활을 일관되게 지켜 준 그의 ‘무위자연’ 사상이 불교 사상의 터전 위에서 노장적인 동양철학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절되었던 현대시의 정신사적 흐름을 지켜 준다는 점에서 또한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여태천이다.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