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정한 작품집
2347호 | 2014년 12월 8일 발행
서지 않은 대한민국의 시한 폭탄
홍기돈이 엮은 ≪초판본 김정한 작품집≫
폭탄은 언제 터질까?
식민지 시대의 땅 주인은 해방을 지나고 전쟁을 지나서도 물러가지 않았다.
일제에서 의원으로, 의원에서 사장으로 이름이 달랐을 뿐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었다.
역사의 폭탄은 언제 터질까?
“이 땅이 이곳 사람들의 땅이 아니랬지? 멀쩡한 남의 농토까지 함께 매립허가를 얻은 어떤 유력자의 것이라고 하잖았서? 그러나 두고 봐. 언젠가는 이 땅의 주인이 너희들의 것이 될 거야. 우선은 어떠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억울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꾹 참고 살아가야 해.”
어조가 어떻게 아까 그 노우트를 읽을 때와 같은 것을 깨닫고, 나는 잠깐 말을 끊었다. 건우는 내처 묵연해 있었다.
“나라 땅, 남의 땅을 함부로 먹다니! 그건 땅을 먹는 게 아니라, 바로 ‘시한폭탄’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 제 생전이 아니면 자손 대에 가서라도 터지고 말거든! 그리고 제아무리 떵떵거려대도 어른들은 다 가는 거다. 죽고 마는 거야. 어디 땅을 떼 짊어지고 갈 수야 있나. 결국 다음 이 나라 주인인 너희들의 거란 말야. 알겠어?”
<모래톱 이야기>, ≪초판본 김정한 작품집≫, 김정한 지음, 홍기돈 엮음, 200∼201쪽
‘이 땅’은 어디인가?
낙동강 하류 ‘조마이섬’이다.
‘조마이섬’이란?
섬의 생김새가 길쭉한 주머니 같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지금 이야기하는 ‘나’는 누구인가?
건우의 중학교 담임선생이다.
이야기의 시발은?
가정방문을 가서 건우의 노트를 보고 울컥했다.
노트에서 뭘 봤나?
가난하고 못 배우고 정치의 혜택이라곤 받아 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조국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지고 총을 메고 군인이 되어야 했던 현실, 그렇게 전쟁 중 죽어 갔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본 것은 전쟁인데 왜 땅을 이야기하나?
그 이전 건우가 써 낸 ‘섬 얘기’가 겹쳤다.
‘섬 얘기’가 땅 이야기인가?
건우의 이야기를 빌리자. “일제 때는 억울하게도 일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다가 해방 후부터는 어떤 국회의원의 명의로 둔갑이 되었든가 하면, 그 뒤는 또 그 조마이섬 앞강의 매립 허가를 얻은 어떤 다른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다든가 하는−말하자면 선조 때부터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오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도깨비처럼 뒤바뀌고 있다.”
실화인가?
‘조마이섬’은 낙동강 하구 을숙도다. 이곳 주민들은 이 땅을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 후 일제가 ‘조선토지사업’을 핑계로 ‘한일신협약’에 의거해 이 땅을 빼앗아 갔고, 해방 이후에는 소유권이 국회의원 수중으로 옮겨졌으며, 그다음에는 하천 부지의 매립 허가를 받은 유력자에게로 넘어갔다.
땅은 정말 “시한폭탄”이 되는가?
조마이섬 사람들을 지키려던 건우 외할아버지만 살인죄로 옥에 갇힌다.
살인죄라니?
엉터리 둑을 쌓아 놓은 섬에 폭풍우가 몰아닥친다. 둑이 무너지면 섬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던 유력자의 의도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냥 두면 참사가 생길 상황이었다. 사고를 막기 위해 건우 외할아버지가 둑을 미리 무너뜨리는데 방해꾼이 나타난다. 그를 물에 떼밀고 만다.
김정한 문학에서 <모래톱 이야기>의 위치는?
한국 문학사에서 그의 위치를 마련해 준 작품이다. 1936년 <사하촌(寺下村)> 이후 발표작들은 등단작의 성취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1956년 <개와 소년(少年)> 발표를 마지막으로 그는 절필 상태였다. 1966년 <모래톱 이야기>로 재기하지 못했더라면 김정한은 역량 있는 작가로 우뚝하게 자신을 드러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김정한의 위치는?
분단 이후 참여문학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순수-참여’ 논쟁이 펼쳐지던 시기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되었다. 또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 등 1970년대 리얼리즘의 꽃이 피기 전 민중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복원해 낸 것도 성취로 꼽을 수 있다.
참여문학, 리얼리즘 문학에서 김정한의 특징은?
그의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역사 경험이다. 식민지 시대에 일제와 결탁해 민중을 억압했던 세력이 해방이 되어 청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력을 공고하게 구축해 가는 양상을 냉철하게 파악했다.
이 책 ≪초판본 김정한 작품집≫에는 또 어떤 작품이 실려 있나?
<수라도>와 <인간단지>다. 민족의 수난과 시련에 파도치는 한 여인의 삶, 사회에서 격리된 나환자들의 절규가 드러난다.
당신은 누구인가?
홍기돈이다.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