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남해찬가
김용호의 서사시 남해찬가
대한민국 영웅 서사시
김용호의 ≪남해찬가≫는 한국 문학에서 흔치 않은 장편 서사시다. 때는 1952년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그가 본 것은 남도 북도 아니었다. 그는 바다를 보았고 영웅을 만났다.
있었다
분명 戰船이 軍兵이
있었다 분명
賊의 총알과 화살에
머리통이
허릿대가
뿡뿡 뚫려 지칠 대로 지친 戰船이 열두 척
헐벗고 굶주려 얼빠진 軍兵 백스물한 명
오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를 마라
낮과 밤 엮어 낀 五 年의 세월 속에
손톱 발톱 다 닳도록 가꾸고 이룬
閑山本營의 戰船 五百 隻은-
분명
戰船과 軍兵은 거기 있었다
왼 몸, 멍들고 곳곳 상처 난 戰船 열두 척
맥이 풀려 쓸어질 듯 고누지 못하는 軍兵 백스물하나
‘이럴 바엔 차라리
차라리 舟師를 페하고
陸戰을 하는 것이…’
어찌 이 말이 임금 혼자만의 분부이랴
이미 없는 것과 마찬가진 것
페하고 안 페할
무슨 건덕지가 있다는 건가
그러나 보라
舜臣은 대뜸 이렇게 아뢰었다
‘戰船이 아직도 열두 척 있아오니
죽을 힘 다하여 싸운다 하올진대
이로써 오히려 넉넉다 하오리다
微臣이 안 죽고 살아서 있는 限엔
賊인들 손쉽게 덤비지 못하옵고
우리를 깔보지 못할 줄 아룁니다’
≪초판본 남해찬가≫, 김용호 지음, 김홍진 엮음, 68∼70쪽
명량해전 직전의 상황인가?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나 대적할 조선 수군은 “곳곳 상처 난 戰船 열두 척”과 “맥이 풀려 쓸어질 듯 고누지 못하는 軍兵 백스물하나”가 전부다. 조정은 우왕좌왕하고 임금은 해전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백의종군하던 순신은 이를 “오히려 넉넉다” 하며 “接賊不敗의 굳은 신념”을 보인다.
≪남해찬가≫는 어떤 작품인가?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다. 시련과 고난, 위기, 투쟁, 목적을 성취하는 우국충정의 생애가 텍스트의 지배적 서사 구조를 이룬다.
영웅전인가?
단순하지 않다. 당대의 민족 수난, 곧 한국전쟁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전한다. 이 작품은 1952년에 창작되었다. 이때 서사시가 많이 창작되었다.
액자형 이중 구조를 사용한 의도는?
영웅의 생애에 대한 전기 서술 형태 때문이다. 화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 이순신의 영웅적 행위를 전경으로 설정한 뒤 현재 상황을 중첩시킨다.
이중 구조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외화와 내화로 구성했다. 화자는 액자 틀을 이루는 외화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1인칭으로, 내화의 핵심 이야기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사건을 서술한다. 이때 내화의 화자는 사건에 대해 종종 객관성을 잃고 액자 외부에 자리한 화자의 주관적 의식을 대변한다.
액자 외부의 화자는 누구인가?
작가다. 일반적인 중립적 화자나 인물 화자와는 달리 실제 시인의 작가적 권위를 차용해 작품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실제 시인이 속해 있는 현실적 시공간을 작품 내적으로 수용해 작품의 의미를 현재화하기도 한다.
외부 화자인 작가의 역할은?
내화의 핵심 이야기에 대해 태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시인의 창작 의식을 드러낸다. 또 내화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여기에서 액자 틀은 현재 시점에서 내화의 핵심 이야기를 현재적 의미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내화 화자의 역할은?
이순신의 일생을 편집해 요약 서술한다. 전지적 화자의 전경화 작업이다.
전경화의 의도는?
집단적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독자에게 정신적 연대감과 일체감을 조성한다. 서사는 임진왜란의 민족 영웅이 국가적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현재화한다.
영웅 서사시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대인격의 완성자이자 민족 이상의 구현자인 이순신의 정신을 계승해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고, 이를 통해 민족 수난을 극복하고 민족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문학 사회학적으로 민족 서사시를 찾기 힘들다는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김용호는 누군가?
시인이자 언론인, 교육가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1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상업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 뒤늦게 유학해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메이지대학 신문고등연구과를 수료한 뒤 귀국해 ≪鮮滿經濟通信社≫ 기자로 근무했다. 해방 후에는 ≪예술신문사≫, ≪시문학≫, ≪자유문학≫ 주간으로 일하다가 서라벌예술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건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 한때 좌익 문학 단체에 관여한 일도 있으나 곧 전향해 한국자유문학가협회에 가담했다. 1973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은 언제 시작했나?
1930년 ≪동아일보≫에 <춘원(春怨)>과 1935년 ≪신인문학≫에 <첫 여름밤 귀를 기울이다>, <쓸쓸하던 그날>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맥(貘)≫ 동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장시 ≪낙동강(洛東江)≫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생전에 6권의 시집을 냈다.
어떤 작품을 남겼나?
식민지 현실 상황에서 생명 공동체의 연대성을 노래하는 ≪낙동강≫, 해방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전경화하고 있는 <혁명투사에게 바치는 노래> 등 장편 서사시를 주로 썼다. 향수를 바탕으로 한 회고와 순수 서정시도 있다. 말기에는 서민 의식을 바탕으로 한 생활시에 집중했다. 허무에 시달리는 대학 강사의 생활을 그린 <날개>로 1956년 제4회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신은 누군가?
김홍진이다.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