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시선 초판본
한국시 신간 <<초판본 박용래 시선>>
언어, 바로 전
시는 간단해 보이는데 읽다보면 자꾸 되돌아 읽게 된다. 특별한 것이 없고 깊은 것도 없으며 괴상하거나 어려운 것은 더욱 없다. 귀가 있고 눈이 있고 감각이 있을 뿐인데 뭔가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단순함은 빈 공간을 만들고 공간의 이동은 시간을 만드는 데 돌이켜보면 그것이 인간과 우주의 실재라는 사실을 문득 짐작하게 된다. 시가 우리를 씼어낸다.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초판본 박용래 시선≫, 박용래 지음, 이선영 엮음, 101쪽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얼핏 보면 전형적인 서정시처럼 단순하고 깔끔하게만 보이지만,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는 눈발’에서 낮고 소박하고 쓸쓸한 곳을 향해 있는 박용래의 시선이 지닌 특유의 애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애수를 엿보는 것이 그의 시를 읽는 묘미다.
묘미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짧은 시행의 운용과 거기서 비롯되는 리듬감, 감정이나 생각을 배제한 채 대상 자체에 몰입한 묘사적 시 쓰기.
그의 시의 리듬은 어디서 시작되나?
대상에 대한 외경심에서 우러나온 겸허함과 언어에 대한 결벽.
리듬은 우리의 무엇을 고양하는가?
음악에 가까운 언어의 미감과 시가 다다를 수 있는 절대 순수의 경지. 그것을 만끽할 기회.
시에서 음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세속성과 개인성, 시인적 아집마저 초탈했던 박용래 시의 탁월함이다.
박용래는 누구인가?
시인 박용래 안에 인간 박용래를 전부 용해시킨 시인이었다. 육체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 박용래는 시인 박용래를 위한 연료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시보다 못한가?
그의 시가 조각을 하듯이, 한 자 한 획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낱말 하나하나에 비길 데 없는 정성을 기울여 쓴 것이었다면, 그의 삶은 ‘시인은 생활이 있어야 하되 생활 자체가 시여야 하는’ 것이었다.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었던 것이 그의 삶이었다.
그는 왜 세상의 눈에 확 띄지 않았을까?
만화방창 흐드러지게 꽃핀 시인이 아니다. 바위틈 꽃처럼 저 홀로 한가롭게 피어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꽃핀 시인은 누구를 말하나?
서정주·김수영·박인환·김춘수….
그의 행간은 어떠했나?
뜨거웠다. 간결하고 정갈하게 걸러져 나온 시행 사이에 수다한 말과 진한 파토스가 있다. 행간에 숨은 숨결조차 그의 시에서 놓칠 수 없는 하나의 편린이다. 아끼고 감춰 둔, 혹은 걸러 낸 많은 말은 그곳, 행간에서 건져야 한다.
박용래 시는 행간에 있었나?
행간에 묻힌 서러움과 정한과 고결한 시혼을 함께 읽지 않고서는 그의 진면모를 결코 헤아리지 못한다.
뜨거운 행간은 시에서 무엇을 하나?
최소한의 금욕적 언어, 삼엄하리만큼 가늘고 섬세하고 치밀한 서정미, 에칭 판화가 생각난다.
눈물의 시인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길, 눈이 많이 내렸다. 두만강 철교를 넘을 때 내린 눈을 회상하며 아침 아홉시 반부터 잠들 때까지 종일 쉬지 않고 울었다고 한다. 틈만 나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전설적인 눈물의 시인이다.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나?
1946년 대전 계룡학숙에서 상업과 국어 교사를 시작했다. 거기서 훗날 시인이 되는 박희선과 의기투합해 동백시인회를 조직했다. 시인 이재복, 시조시인 정훈, 극작가 하유상 등과 밤낮없이 이름 없는 막걸리 집에 둘러앉아 문학을 토론하고 습작을 품평했다.
언제 등단하나?
1956년 박두진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 <황토길>, <땅>이 소개되었다.
박두진은 뭐라고 추천했나?
“가늘고 섬세하고 치밀한 감각적 리리시즘은 차라리 천성적”이라면서 “불면 날아갈 듯한 당신의 시에서 오히려 늘 서릿발같이 싸느랗고 날카로운 삼엄미까지를 느낀다”고 했다.
임우기의 평은?
“시어의 조립이나 의미의 구성이 아닌 침묵과 여백으로 박용래는 시를 언어의 차원에서 삶과 우주라는 본연의 세계로 돌려놓았으며 박용래 시의 중요성은 그 침묵과 여백이 지적 성찰이나 선적(禪的) 포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삶과 자연과 우주와 한 몸을 이루려는 혼신의 노력 끝에 나온 우주적 깊이와 넓이에 있다.”
2013년 벽두, 박용래 시의 역할은?
과잉의 시대다. 물질 과잉, 말 과잉, 욕망 과잉. 박용래의 순수와 절제와 극기와 무욕의 세계를 그의 시로 만날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선영이다. 시인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