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박정만 시선
한국시 신간 <<초판본 박정만 시선>>
불운한 시인의 대명사
박정만은 스무 날 동안 술 오백 병을 마시고 시 삼백여 편을 쏟아낸다. 술 먹고 망가진 대한민국과 어깨를 엮고 남도 소리에 실어 보낸 그의 시는 한의 노래였다.
瘀血을 재우며
어혈을 풀기 위해
한약 한 제를 지어 왔다.
코 위에 안경을 걸친
한약방 주인이
물에다 끓이지 말고
막걸리를 부어 끓이라 한다.
술 먹고 大韓民國처럼 망가진
내 몸뚱이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는 듯한 말투다.
참 용타고 생각하며
아내는 탕기에 술을 넣어
약을 달이다.
펄펄 끓는 물 솥에 수건을 적셔
내 몸의 어혈 위에 찜질도 하고…
탕기에선 한밤내 부글부글
죽음이 들끓는 소리.
절명하라, 절명하라, 절명하라,
이를 갈다 이를 갈다
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
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
하나가 되고…
어혈은 풀어져서
내 몸의 피와 살과 뼈에 스미고….
≪초판본 박정만 시선≫, 조운아 엮음, 65∼66쪽
증오와 울분이 느껴지는데?
박정만식 한의 표출 방법이다. 강하게 절규하고, 증오하고, 혐오감을 드러낸다.
박정만이 누군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개성적 서정의 영역을 개척하다가 사라져 간 불운한 시인의 대명사다.
광기의 시인이 바로 이 사람인가?
때로 섬뜩한, 때로 청승맞은 편편의 시를 광기로 장식해 나갔다. 비극적 서정의 밑변에는 토속의 가락이 결합되어 서정시의 백미를 드러낸다. 서정과 가락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벼려, 그만큼 청신하고 영롱한 시를 쓴 시인은 흔치 않다.
1년 만에 시집 6권을 출간했다는 말이 사실인가?
시 창작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접신(接神)의 경지’를 경험했다고 한다. 1987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술 500병을 마시며 시 300여 편을 썼다. 작품 수준도 고르다.
한국시 신간 <<초판본 박정만 시선>>
미쳤던 것인가?
영적인 폭발력과 파괴력은 일종의 광기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은 광기와도 같은 열정이 아니겠는가.
광기의 열정으로 무엇을 쫒았는가?
한이다. 삶에서 느끼는 좌절, 비애, 아픔 등이 응축되어 응어리진 것이 한이다. 그러나 그의 한은 비극적 서정에만 함몰되지 않고 점차 편안한 서정으로, 초월적이고 달관적인 서정으로 나아간다.
그의 한은 어디서 왔나?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된 생래적 비극적 세계관이 한수산 필화 사건을 겪으면서 심화됐다.
한수산 필화 사건이란?
한수산 작가가 1981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에 나오는 몇몇 표현이 고위층을 비아냥거린 표현이라는 이유로, 한수산을 비롯해 그와 친분이 있었던 박정만과 신문사 관계자들이 함께 기관에 끌려가 사흘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후유증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정신적 충격, 아내와 이별, 건강의 악화를 초래했다. 결국 1988년 간경화로 작고했다. 통음을 낳고, 한을 낳고, 절망을 낳았다. 위의 시를 보면 고문 때문에 생긴 어혈을 다스리기 위해 끓이는 약은 죽음이 들끓는 소리로 전이되고, 이는 울분이 들끓는 소리로 이어진다. 시 곳곳에서 울분과 고통으로 맺힌 한의 흔적이 발견된다.
술 먹고 망가진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였는가?
그의 한은 사회의식으로 확대된다. ‘술 먹고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부당한 폭력성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감,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전달했다.
박정만의 한에는 무엇이 있는가?
노래가 흐른다. 한의 정서가 남도창의 가락으로 흐른다. 전통 율조인 3·4조 내지 4·4조, 민요의 3음보나 4음보를 계승했다. 산문의 시대, 생각하는 시가 유행하는 시대에 그의 시는 노래하는 시로 나아간다.
노래하는 시란 감정 과잉으로 인한 한풀이나 넋두리 아닌가?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의 짙은 서정은 오히려 인간적이고 신선하다. 그가 천착한 혼의 울음 또는 한의 시편들은 멀리는 전통 시혼, 가까이는 소월, 영랑, 미당 시의 숨결과도 그 맥이 닿아 있다. 박정만의 시를 살펴보는 일은 한국 전통 서정의 본질과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오늘의 독자와 무엇이 되어 만나는가?
깊은 울림으로 독자에게 지극한 연민을 이끌어 낸다. 개인적 감수성 이면에는 당시 부조리한 사회와 시대 현실이 자리한다. 그의 시는 삶의 진정성을 성찰케 한다.
당신은 누군가?
조운아다. <박정만 시의 시간의식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