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박팔양 시선
추선진이 엮은 ≪초판본 박팔양 시선≫
친일이 희망이었나?
식민지 현실과 투쟁, 리얼리즘과 시의 예술성, 모더니즘 또는 도회의 일상과 우울, 사색과 희망 그리고 친일을 의심받은 삶. 북으로 가 훈장도 받았지만 밤차의 종착역은 숙청과 복권, 7년 뒤의 사망이었다.
밤車
流浪하는 백성의 고달픈 魂을 실고
밤車는 헐레벌떡거리며 달아난다.
도망군이 짐 싸가지고 솔밭 길을 빠지듯
夜半 國境의 들길을 달리는 怪物이어!
車窓 밖 하늘은 내 답답한 마음을 닮았느냐?
숨 매킬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하고나.
流浪의 짐 우에 고개 비스듬이 눕히고 생각한다.
오오 故鄕의 아름답던 꿈이 어디로 갔느냐?
비들기 집 비들기 장같이 오붓하던 내 동리,
그것은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車바퀴 소리 諧調 맞혀 들리는 중에
히미하게 벌려지는 뒤숭숭한 꿈자리여!
北方 高原의 밤바람이 車窓을 흔든다.
(사람들은 모다 疲困히 잠들었는데)
이 寂寞한 訪問者여! 문 두드리지 마라.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울고 있다.
그러나 機關車는 夜暗을 뚫고 나가면서
“돌진! 돌진! 돌진!” 소리를 질른다.
아아 털끝만치라도 의롭게 할 일이 있느냐?
疲勞한 백성의 몸 우에
무겁게 나려 덮인 이 지리한 밤아,
언제나 새이랴나? 언제나 걷히랴나?
아아 언제나 이 답답함에서 깨워 일으키려느냐?
—昭和 二年
≪초판본 박팔양 시선≫, 추선진 엮음, 59∼60쪽
지금 누가 밤차를 타고 울고 있는가?
조선 민족이다. 아름다운 꿈이 있던 고향과 오붓하던 동리를 일본 제국주의에 빼앗겼다.
어디로 가는가?
낯선 곳이다. 새로운 땅을 찾아 북방 고원을 헤매는 밤차에 실려 간다.
그들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누구인가?
식민지 현실에 고뇌하는 지식인이다. 민족이 겪는 고통에서 벗어날 의로운 일을 생각한다.
의로운 일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투쟁이다.
이 시의 어디에 투쟁이 있는가?
이 시를 실은 ≪여수 시초≫를 엮으며 일제의 검열로 누락되었다. 1927년 ≪조선지광≫에 처음 발표할 때는 5연 4행에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가 있느냐’는 적극적인 투쟁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도 카프는 왜 이 시를 비판했나?
낭만성과 서정성 때문이다. 당시 카프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계급의식을 앞세운 문학만을 추구했다.
박팔양과 카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리얼리즘과 함께 시적 예술성을 추구했다.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던 언론기관의 기자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키웠고 이를 시에 반영했다.
그의 시론은 무엇인가?
“시는 직감과 인상을 존중하는 가운데 감정을 미(美)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시론을 바탕으로 서정성 또한 드러내려 했다.
그의 시론은 어디서 확인할 수 있나?
≪여수 시초≫다. 1940년 내놓은 첫 번째 시집이다. 스스로는 “습작집”이라 했다. 일제의 검열로 일부 작품이 수정되거나 누락되어 그의 시적 편력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하지만, ‘현실과 서정의 조화’라는 시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여수 시초≫에는 어떤 작품이 실렸나?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창작·발표한 시 47편을 수록했다. 창작 시기와 작품 주제에 따라 근작(近作), 자연·생명, 도회, 사색, 애상, 청춘·사랑, 구작(舊作) 등 소제목을 붙였다. 해방 전 박팔양의 초기 문학 인생이 담겼다.
박팔양의 문학 인생은 어떻게 시작하나?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동급생 박영희, 김기진, 김복진을 만났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1925년 카프에 가입하고 프로문학을 지향했다. 그러나 곧 카프를 탈퇴하고 구인회에 가담했다.
카프를 떠나 구인회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카프를 탈퇴한 시기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1930년 볼셰비키화로 제2차 방향 전환 직후 탈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때 카프 내 강경파가 프로문학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프로문학의 예술성이 사라졌다. 그는 사상성과 예술성의 절충을 고심하다 탈퇴했고, ≪조선중앙일보≫에 다니며 만난 이태준, 정지용과 문학적 교감을 나누게 되어 구인회에 가담했다.
구인회 시절 그의 문학은 어떤가?
구인회가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도회의 일상성과 권태, 우울 등을 표현한 시를 발표했다. 한편 도시적 병리 현상의 반대 항으로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는 사상을 시에 담았다.
‘근작’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나?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 드러난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썼다. 비슷한 시기 창작한 시를 담은 ‘사색’에는 희망을 적극적으로 현실화하려는 화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희망이 있었나?
당시 민족 현실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의 시에 보이는 과장되게 밝은 어조는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친일 논란인가?
그렇다. 친일 단체인 협화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드러났다. 만주국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만선일보≫에 재직했다는 점과 함께 친일 행적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해방 이후 어떻게 살다 갔나?
1946년 월북한 뒤 언론계와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평북신보≫, 공산당 평북도당 기관지인 ≪바른말 신문사≫, 좌익계 신문인 ≪정로≫의 편집부장을 맡았고, 한국전쟁 때는 종군 작가로 참전해 공로메달 및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교와 평양문학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966년 한설야 숙청 뒤 1967년 반당 종파 분자로 몰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1년에 복권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88년 사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추선진이다. 경희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