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백두산
북한문학 최고의 서사시 <백두산>
백두산과 압록강이 말하는 항일 무장 투쟁의 시간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을 엮고 해설한 윤송아는 이렇게 말한다.
”
북한 최초의 서사시이자 북한 문학사 안에서 항일 혁명 문학의 모범적 전형으로 추앙받고 있는 작품이다. … <백두산>은 ‘김 대장’이라는 ‘민중적 영웅’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승리와 해방의 의지를 역설하고 있으며, 이러한 민족 해방의 열망을 새 조국 건설이라는 과업과 연계시켜 당대의 실천적 각성을 촉구하는 암묵적 프로파간다의 역할까지 담보함으로써 해방 이후 북한 사회 건설을 추동하는 문학적 기폭제로서 기능해 왔다. … 하지만 <백두산>이 도식적인 김일성 우상화나 생경한 미적 형상화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풍부한 이야기성과 웅장한 스케일, 장엄한 비장미를 담보하면서 장편 서사시로서의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한국 문학사 안에서 흔치 않은 ‘항일 무장 투쟁’이라는 소재를 ‘백두산’, ‘압록강’ 등의 민족적 표상을 통해 극적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
”
1937년 겨울 백두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1장
1
고개 뒤에 또 고개 —
몇몇이나 있으련고?
넘어 넘어 또 넘어도
기다린 듯 다가만 서라!
한 골짜기 지나면
또 다른 골짜기 —
이깔로 백화로 뒤엉켜 앞길 막노니
목도군이 고역에 노그라지듯
골짜기는 으슥히 휘늘어져 있어라!
울림으로 삑삑하여 몇 백 리
백설로 아득하여 몇 천 리 —
사나운 짐승도
발길 돌리기 서슴어 하고
날새도 고적에 애태우다
날아 날아 떠나고야 마는
장백의 중중심처 흥산골 —
절벽 사이 칼바람에 쌓인 눈 우에
뚜렷이 그려진 이 발자욱,
어디론지 북으로 북으로 가 버린
가없이 외로운 이 발자국 —
어느 뉘의 자취인가?
눈보라에 길 잃었던 포수
절망에 운명 맡긴 자취인가?
어느 뉜지 북으론 웨 갔느뇨?
북에선 백두산이 백발을 휘날리며
한설을 안아 뒤뿌려치는데,
서리발로 한숨 쉬고 있는데!
2
눈 우에 뚜렷한 이 발자욱
눈여겨 살피라 —
그 속엔 절망의 흔적 없으리,
지난밤 흰 두루마기 사람들
설피 신고 이곳 꿰여 북으로 갔으니
사람은 몇 백이나 되여도
발자욱은 하나만 남겨 두고 —
그런데 오늘은 이 발자욱 허물이며
수십의 왜놈의 무리
허리까지 눈무지에 빠지며
“토벌”의 큰불 밀림에 지르련다.
맨 앞엔 군견 두 마리 날뛰고
그 뒤엔 안경이 번뜩이고
또 그 뒤엔 서리 어린 총부리와 총부리 —
“대체 한 사람의 발자욱뿐 —
모두 어디로 갔느냐 말이야!”
절벽에 안경을 두리번두리번 —
맨 앞 놈의 중얼거림
“글쎄요… 신출귀몰은…”
옆 놈의 대답 끝나기도 전에
“땅” — 총소리
얼어든 대기를 깨뜨린다.
“안경”이 눈에서 다리도 못 뺀 채
경례나 하듯이 꺼꾸러진다.
3
그다음…
그담엔 흥산골이 터졌다 —
총소리, 작탄 소리, 기관총 소리,
놈들의 아우성 소리!
그담엔 절벽이 무너졌다
다닥치며 뛰치며 부서지며
바위돌이 골짜기를 쳐부신다,
“만세!” “만세!” — 골 안을 떨치며
산비탈에 숨었던 흰 두루마기들
나는 듯이 달려 내렸다.
여기서도 돌격의 “악!”
저기서도 “악!” “악!”
설광과 마주치는 날창
번개같이 서리찬 하늘을 찢는다.
“동무들!
한 놈도 놓치지 말라!”
이것은 작렬되는 육박의 첫 구령 소리,
4
산비탈 바위 우에
청년 한 분 버쩍 올라선다
후리후리한 키꼴에
흰 두루마기 자락이
대공으로 솟아오르려는
거센 나래같이 퍼덕이는데
온몸과 팔과 다리 —
모두 다 약진의 서슬에 불붙고
서리발 칼날의 시선으로
싸움터를 단번에 쭉 — 가르며
“한 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부르짖었다
바른손 싸창을
바위 아래로 번쩍이자
마지막 발악 쓰던 원쑤 두 놈이
미끄러지듯 허적여 뒤여진다 —
“한 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재쳐 부르짖었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삼도 왜적이 치 떠는
조선의 빨찌산 김 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태산을 주름잡아 한 손에 넣고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축지법을 쓴다고 —
북천에 새별 하나이 솟아
압록의 줄기 줄기에
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
이 나라에 천 명의 장수 났다고
백두산 두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찌산 김 대장!
5
육박의 불길 멎었을 때
밀림의 주인공 빨찌산들
주섬주섬 원쑤의 무기 거둔다
몇 놈이나 복수의 칼 맞았느냐?
몇 놈이나 빨찌산 전법에
“천황폐하”도 산산 줄달음에 팽개치고
“무사도”도 갈 데로 가라 —
도망치다 엎드러졌느냐?
“한 놈도 빼우지 않았습니다.”
철호의 보고
“놈들은 이번에도
무장 바치러 왔지!”
김 대장의 높은 말소리
그리곤 호탕한 웃음소리 —
“하… 하… 하…”
함박꽃인 양 그 웃음소리
떨기떨기 내려져 눈 우에 꽂기는 듯!
6
이날 밤에 눈이 내렸다 —
하늘도 땅도 바위츠렁도
흥산골 싸움터도
눈 속에 묻히였다.
이깔밭만 칠월의 꽃 피는 삼밭이 되고
대부동 고목에도 때아닌 꽃이 피다
이 밤 빨찌산 부대
나흘 만에 천막에 들다!
내굴 냄새 웨 그리도 구수하고
모닥불도 불꽃 채로 품속에 껴안을 듯,
이날 밤 대장이 든 천막엔
새벽까지 등불이 가물가물…
허더니 아침엔 눈보라 치는데
정치 공작원 철호 먼 길 떠났다.
전송하는 대장의 말 —
“철호 조심하오! 믿소!”
덤썩 틀어쥐는 대장의 손길
심장 속에 해발19)을 일으켜라,
해는 눈보라 속에 숨어 있어도
추위는 박달같이 땅을 얼궈도 —
7
눈보라… 눈보라…
겨울이 마지막 악을 쓴다
무엇이나 찾는 듯 골짜기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도
잣솔을 뒤잡아 흔들며
잉 — 잉 통곡치누나…
자작나무 휘여잡고
못 살겠다 몸부림치다가도
노한 짐승같이 절벽에 달려드누나…
절벽에 달려들어선
쳐부시고 딩굴고 물어뜯다가는
산등에 올라 미친 듯 아우성치며
하늘도 땅도 휩쓸어 가지고
동남으로 줄달음치누나!
눈보라… 눈보라…
네야 산 넘고 골 지나 또 지나
압록강까지 이르리라!
너를 동무 삼아
철호 저 산 넘으리!
압록을 건너 조상의 땅 밟으리!
눈보라! 눈보라!
듣느냐?
너는야 철호를 도와주거라 —
너도 장백의 눈보라 아니냐!
철호는 멀리도 간단다
국경선 H시도 그의 길에 놓였고
성진 함흥도 가야만 되고.
너 장백의 눈보라야!
불어 또 불어 철호를 감추라 —
왜놈들을 기절케 하라,
불어 또 불어 철호를 건네우라
압록강을 건네우라!
<<초판본 백두산>>, 조기천 지음, 윤송아 엮음, 8~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