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불만의 도시
유현종의 ≪초판본 불만의 도시≫
매판과 무역에 대한 판단력
자국에 도움이 되면 수출왕이고 해를 끼치면 매판자본이라 한다. 사업은 어려운 것인데 손익으로 애국과 매국을 판정할 수 있을까? 실패와 의도를 어떻게 가릴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이 김강연이가 금강재벌을 해체하고 다른 재벌들의 그 더러운 내막을 국민 앞에 털어놓고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다 해 보자. 국민들은 나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나는 모든 재산을 국민들의 이름으로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하겠지. 국가는 나에게 훈장을 내려 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건 위장병 환자에게 잠깐 먹여 주는 시원한 한 목음의 소화수(消化水)에 불과하지 않을 것인가 말이다. 그렇다고 위장병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내 재산 십오억을 뿌린다 해야 착복하기 좋아하는 높은 백성이 삼켜 버릴 테구. 허무하지 않을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만 된다는 격언은 옳은 말이야. 후진국에서 변변한 민족자본이 없는 한 매판재벌의 횡포는 발전 도상에서 볼 때는 필요악이다. 세계의 유수한 재벌과 한국의 재벌의 성격을 똑같은 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한상조 그걸 알란 말이다. …우선 참여하는 것이다. 현실을 똑바로 주시하며 대의명분을 찾아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면 되는 게 아닌가. 나의 은퇴로써 현재의 단계는 끝내면 되는 거야. 제二세부터 올바른 기업가로 성장해 달라는 것이다. 내 말 알겠나?”
≪초판본 불만의 도시≫, 유현종 지음, 노희준 엮음, 207~208쪽
재벌소설인가?
제3공화국 시절 대졸 청년 한상조가 주인공이다. 직장을 찾지 못해 채석장에서 일한다. 애인 주련의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장례비가 없다. 상조는 무작정 금강산업에 찾아가 돈을 빌린다. 사장 김강연은 상조의 패기를 높이 사 그를 특채한다.
재벌 회장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1960년대 신흥 재벌 창업주의 철학이다. 매판자본의 생리가 드러난다. 한국 재벌은 자본과 기술이 모두 부족해 동등한 조건에서 외국 재벌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선 개발 후 민주’ 논리를 편다.
금강산업은 어떻게 매판자본을 전개하는가?
공장을 세우면서 건설 자재에 다른 물건 끼워 밀수하기, 밀수를 은폐하고자 공무원 매수, 비리 노출을 대비한 검사 매수, 해외 재산 도피, 탈세 등을 한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연상된다.
한상조는 왜 하필 김강연을 찾아갔는가?
대학 친구들 모임인 ‘정간회’를 통해서 알았다. 정간회는 4․19 정신을 이어 나가려고 하며 ‘선 민주 후 개발’을 주장한다. 수시로 모여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토론한다. 매판자본 성토 토론 도중 금강재벌 얘기가 나왔고 김강연을 악덕 상인으로 규정한 바 있다. 한상조는 이 토론에서 들었던 김강연의 이름이 생각나 금강에 찾아갔다.
특채된 후 상조의 갈등은 어떤 것인가?
‘빵의 문제’ 앞에 뜻을 바꾼다.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는가가 문제다’며 매판재벌을 교정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정간회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분배의 정의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분배의 민주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4·19세대가 근대화의 모델로 삼는 유럽의 민주주의는 그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결코 개발도상국에까지 ‘분배’될 수 없다. 유럽 민주주의는 시민혁명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나라들의 희생에 의해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에 의한 분배는 불가능한가?
만약 ‘선 민주’를 했다면 ‘분배’는커녕 기아와 궁핍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반대로 김강연의 주장처럼 든든한 민족자본을 건설한 ‘미래’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분배’가 될 수 없다. 선진국의 공통점은 외국 착취를 통한 성장이었다.
외부 착취 없이 자국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한가?
초점은 ‘내부 착취’냐 ‘외부 착취’냐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상황은 자본주의의 ‘외부’가 되어 외국 독점자본에 의해 착취당할 것이냐, 아니면 ‘내부’의 국민들을 착취해 비록 강대국에 종속된 형태로나마 독점자본을 형성할 것이냐에 있었다.
김강연과 정간회는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갈등인가?
그렇게만 생각하면 1960년대에 대한 지독한 오해다. 정간회는 김강연과 마찬가지로 문제의 핵심을 재화의 민주주의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며, 김강연은 적어도 미래에는 분배 정의가 가능해지리라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김강연과 정간회는 앞뒤가 뒤바뀐 빼쏜 꼴이다.
한상조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뭘 하는가?
매판재벌에 고용되어 제도의 운용을 점진적으로 뜯어고칠 투지와 패기는 없는가. 그들의 머릿속에 건강한 이념을 넣어 줄 수 없는가를 묻는다. 그의 문제의식은 ‘선 현실 후 이상’이다.
정간회와 금강의 갈등은 어떻게 발전되는가?
‘신문 광고 싸움’에서 정점을 이룬다. 정간회는 자체 조사한 금강의 비리 내역을 신문 광고로 발표한다. 한상조는 금강산업 기획부 차장으로서 반박 광고를 쓴다.
상조의 반박 광고는 뭐라고 말하는가?
‘국민을 현혹시키며 양심적인 기업가를 우롱하는 유령 단체의 정체를 밝히라! 도대체 수사기관은 뭘 하고 있는가! 만일 저들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날뛰고 있다면 그래도 관용을 베풀 텐가!’라고 주장한다. 색깔론까지 꺼내 든다.
상조가 강연을 만나는 계기는 너무 우연적이지 않은가?
그 점이 작품의 통속성을 부각시킨다. 불우한 청년이 우연히 높은 사람 눈에 들어 출세한다는 얘기는 전형적인 통속소설의 형태다. 드라마로 치자면 1980년대 <사랑과 야망>, 1990년대 <젊은이의 양지> 류의 1960년대 버전인 셈이다.
이 소설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실제 여부는 몰라도 1960년대 한국에서 이런 출세 드라마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설사 불가능하더라도 1968년작인 이 소설은 당대 지식인의 ‘미성숙’한 욕망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유현종은 누구인가?
1940년에 태어났다. 1961년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최인훈은 그를 “활동적인 풍속의 반영”에 주력한 작가로 평가한다. ≪불만의 도시≫ 역시 주제 의식은 당대 상류층과 매판자본 비판을 향해 있지만 구성은 대중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독특한 경향을 보인다. 1975년 ≪동아일보≫에 ≪연개소문≫을 연재한 후로는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에 매진했다. ≪천년 한≫, ≪임꺽정전≫, ≪대조영≫, ≪낙양성의 봄≫ 등을 썼다. 2000년대 이후에도 작품 활동이 활발하다.
당신은 누구인가?
노희준이다. 소설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