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신석초 시선
나민애가 엮은 ≪초판본 신석초시선≫
서러워, 모두 다 사라질 것이니
한학에서 시작했다. 시전과 당시를 익혔다. 그러고 서양 시를 만났다. 발레리와 그리스를 읽었다. 다시 되돌아와 향가와 고려가사와 시조를 듣는다. 몸은 늙고 정신은 유순하다. 다 사라졌고 길 잃지 않아 돌아왔다.
서러라! 모든 것은 다라나 가리
−포올·봐레리이
翡翠! 寶石인 너! 노리개인 너!
아마도, 네 永遠히 잊지 않을
榮華를 꿈꾸었으련만,
내가 어지러운 懊惱를 안고
슬픈 이 寂寞 속을 거니를 제,
저! 깊은 뜰을 비최는
달빛조차 흐리기도 하여라
靑瓦 헡어진 내 옛뜰에
無心한 모란꽃만 푸여지고
翡翠! 너는 破滅에 굴러서
蒼白히 버슨 몸을 빛내며
稀微한 때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볕쌀을 줏는다
아! 그윽한 잠 잔잔한
燭불 녚에 잠 못 이루는
女人의 히고 느린 목덜미!
단장한 그 머리는 주러져서
벼개에 흐르는 흰 달 그림에
無爲 寂寞한 꽃닢을 받혀라
翡翠! 내 轉身의 절 안에
산란한 時間의 발자추
茶毘와 날근 흔적을 어릴 제
너는 魅惑하는 손에 끌리며
그지없는 愛撫에도 오히려
不滅하는 純粹한 빛을 던진다
나는 꿈꾸는 裸身을 안고
數만흔 虛無의 欲求를 사르면서
혼자서 헐린 뜰을 내리려 한다
저곳에 시드른 蘭꽃 한 떨기
또 저곳엔 石階 우에 꿈결같이
떠오르는 永遠한 處世의 자태!…
어쩔까나?
翡翠! 나의 亂心을!…
내가 이 廢墟에 거니고 또
떠나는 내 마음의 넌출을
人間의 얼크러진 길로 알고서
孤獨한 靑玉에 몸을 떨며
詩琴의 슬픈 노래를 부를까나!
翡翠! 오! 翡翠! 無垢한
네 本來의 光耀야 부러워라
저− 深山 푸른 시내ㅅ가에
헡어진 부엿한 구름 떠도라서
蒼天은 흐득이는 黎明의 거울을 거노나
아! 懊惱를 아른 나!
(永劫을 찾는 나!)
秘密한 琉璃 속에 떠서 흔들리는
나여 너를 불러라 빛과
흠절의 숲풀 우의 寶石이여!
나여! 精神이여 滅하지 않는
네 밝음의 근원을 찾어라!…
≪초판본 신석초 시선≫, <翡翠斷章>, 신석초 지음, 나민애 엮음, 3∼6쪽
<翡翠斷章>은 석초의 등단 작인가?
1935년 정인보 소개로 ≪신조선≫ 편집 일을 맡으면서 ‘석초(石初)’란 필명으로 발표했다. 여기에는 1940년 일부를 수정해 ≪문장≫에 발표한 것을 수록했다. ≪신조선≫에 이 시 외에도 <밀도를 준다>, 에세이 <햄릿>을 발표했다. 1937년 이육사와 함께 ≪자오선≫을 출간하면서 문단 활동을 본격 시작한다.
“서러라! 모든 것은 다라나 가리”는 폴 발레리 인용인가?
≪신조선≫에 발표할 때는 없던 문구다. 당시 발레리에게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지만 이 시는 제목, 소재, 문제의식이나 내용 면에서 발레리의 상징주의 시풍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자적이다. 오히려 동양 전통에 기댄 상상력이다. 그는 “발레리의 영향은 나의 한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프랑스 문학은 일본 유학 시에 흡수한 것인가?
일본 법정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1년과 1932년 사이였다.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워 프랑스어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번역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원서로도 발레리에 대해 연구했으리라 짐작한다. 한국 문단에서는 1935년에 비로소 발레리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는데, 신석초는 1938년에 벌써 전문적인 수준에서 발레리에 관한 산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석초를 발레리로 안내했는가?
발레리는 비시적(非詩的) 요소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시를 지향했다. 동시에 도달할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시는 그런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석초 역시 발레리가 이상으로 삼은 순수시에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시적 경향을 좇기보다 자신의 시적 세계를 확장하는 데 힘썼다.
석초의 계급 환경, 역사 환경이 작용한 것인가?
전통적인 사회구조가 와해되는 시점에 전통적인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실은 모순과 불일치의 혼란이었다. 정신적인 자기 모색이 필요했고 동서양 정신사를 두루 탐색한다. ‘고전주의자’ 발레리를 만난다. 그를 자신의 다른 버전으로 본다. 지성적이고 회의적이며 전통 위에 있으면서도 전통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인간, 곧 거인과 시인을 발레리에서 발견한다.
‘지성’은 발레리와 석초에게 각각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는가?
발레리는 지성을 숭배해 한때 시작(詩作)을 포기하고 ‘침묵의 20년’에 들어간다. 수학, 물리학을 연구했다. 석초의 시는 서양적인 성격과 동양적인 성격의 혼종이다. 두 성격이 대립하면서 그의 시를 만든다.
그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서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가?
아니다. 지성적 자아가 문학적 자아와 일치해 서양과 동양의 지성을 주유하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종합을 이뤘다. 이것이 석초 시의 성과다.
신석초와 발레리의 접점은 어디인가?
‘지성’이다.
지성은 어떤 과정을 통해 문학이 될 수 있나?
지성은 문학이 아니다. 석초는 ‘고전’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고전을 탐독해 정신적으로 최고 경지에 있는 가치를 탐색한다. 그렇게 습득한 고전 지성을 현대적이고 문학적으로 전개하는 방식이 석초 문학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석초가 운용한 방법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처용’이라든가, ‘유파리노스’,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화적 인물을 소재로 신화가 전제하는 사상적인 면모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지성의 관념성은 구체적인 인물의 마스크를 썼을 때 추상을 극복하고 디테일한 이미지와 구조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시 창작과 개작은 지성과 문학의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보통 시가 길어지는 것은 담론 만연, 이미지 범람, 장르 규범 와해 때문이다. 그의 시가 길어진 이유는 이 중에서도 담론 문제, 곧 ‘지성’이라는 무겁고 유구한 덩어리를 텍스트 안에서 펼쳐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를 완성한 뒤에도 개작하고 또 개작했던 것 역시 사유하고 사색하는 지성의 역할 때문이다.
신석초는 어떤 시인인가?
홍희표는 ‘서구적인 시적 방법인 상징주의에서 동양적 관조의 유현한 세계로 파고들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에로 발전되어 간 시인’이라 했고, 조용훈은 ‘1930년대의 고전부흥운동과 김기림 등이 주도한 서구 모더니즘을 지양한 새로운 시적 양식을 모색한 시인’이라 했다. 40여 년간 시작 활동을 펼쳤으나 작품 수는 150여 편에 불과한 과작 시인이지만 한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지성과 사상의 배경과 성장은 어떤가?
1909년 충청도 명문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고택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본명은 신응식이다. 부친은 선비의 품격과 개화 지식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한학자를 초빙해 석초가 한학 교육을 받도록 하는 한편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히게 했다. 덕분에 신석초는 자라면서 전통 교육과 신식 교육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다. 1925년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다 신병으로 자퇴하고 1929년 도일했다. 1935년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에는 카프 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통 농업 부르주아가 카프 맹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가?
‘유인’이라는 필명으로 평문을 써서 발표했다. 1931년 ≪중앙일보≫에 <문학 창작의 고정화에 항(抗)하야>, 1932년 ≪신계급≫에 <예술적 방법의 정당한 이해를 위하야> 등이 이 시기 평문에 해당한다. 신응식이라는 본명으로 ≪문학건설≫에 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두 계급문학권 활동이다. 1933년 박영희와 함께 카프를 탈퇴하고 시인으로서 활동을 전개했다.
이육사와 각별한 관계였는가?
신석초는 다른 문인들과 거의 교유하지 않았다. 해방 전까지 이육사, 이병각, 조풍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친분 있는 문우가 없을 정도로 문단 활동이 적었다. 그러나 육사와는 매일 만나다시피했고 서로의 고향 마을로 함께 여행을 다닐 정도로 사이가 각별했다. 육사는 신석초의 시를 가져다 ≪문장≫, ≪자오선≫에 실리도록 도왔다.
석초의 대표작은 역시 <바라춤>인가?
1959년에 제2시집 ≪바라춤≫, 1970년에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에 제4시집 ≪처용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을 간행했다. 이 가운데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이 그의 대표작이다. 정신과 육체, 빛과 어둠, 감각과 관념, 지성과 감성 등 갈등, 충돌하던 이질적인 요소를 종합하는 시도가 돋보인다.
1957년 이후 사망 시기까지의 삶은 색깔이 달라진 것 아닌가?
1957년 평생지기 장기영의 권유로 ≪한국일보≫ 문화부장 겸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대외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959년 ≪바라춤≫을 출판하고 이듬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65년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말년에는 시 창작과 ≪시경≫ 번역을 병행했다.
말년에는 가치 갈등이 해소된 것인가?
가장 전통적인 환경에서 동양 고전과 사상을 익히고, 제도권 교육과 동경 유학을 통해 발레리로 대표되는 서양의 지적 사유를 습득했다. 카프 맹원으로 활약하며 계급문학을 통해 문학적 발언을 시작했으면서도 종내에는 서정적이고 고아한 풍취의 작품들로 문학사에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모순적인 양극을 종합하는 것을 스스로 ‘상모(相貌)’라 불렀다.
모순의 해소에 대해 석초 스스로의 설명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한학적인 학습, 특히 시에 있어서는 시전과 당시로부터 시작했다. 그다음에 서구의 시에 접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다시 되돌아와 우리의 시가인 향가나 고려가사나 시조 등을 섭렵했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나의 작품 가운데에 일종의 정신의 혼합물을 담아 온 셈이다.”
신석초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 갔나?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만 학술적 연구가 서정주, 이육사, 조지훈, 유치환 등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시인들만큼 축적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셈이다. 후속 연구에서는 <바라춤>이 거둔 미학적 성과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정신사적 흐름 위에서 그에 대해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독자에게 그의 시는 무엇인가?
대중에겐 다소 난해하다. 난해함이나 작품이 넘나드는 방대한 정신적 스케일은 ‘지성적 문학’에 동반되는 특징이다. 이 책에는 시의 초판본을 수록했으므로 오히려 이런 난해함의 기원을 확인하고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인의 문학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의 전체적인 시 세계를 일별하고 우리 문학이 지닌 정신사적 궤적을 확인할 있다면 행운이 아닐까?
당신은 누구인가?
나민애다. 2007년 ≪문학사상≫ 평론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평론가로 등단했다. 대학에 출강하며 문학을 수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