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선 초판본
최도식이 엮은 ≪초판본 심훈 시선≫
심훈, 자기를 검열하는 지성
행동하려는 양심과 행동하지 못한 후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인. 기회만 있으면 독립을 운동하겠다는 의지는 영화와 시, 소설과 기사의 계몽 활동이 된다. 꿈은 부서졌을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 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 같이
鍾路의 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저 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듯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꺽구러저도 눈을 감겠소이다.
≪초판본 심훈 시선≫, 최도식 엮음, 26쪽
그날이 언제인가?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조국이 독립하는 날, 삼천리 방방곡곡에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는 날이다.
“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 물이 뒤집혀 룡소슴”친다는 말은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인가?
아니다. 심훈이 실제 체험한 감격과 흥분을 비유한 것이다. 그는 3·1만세 운동 때 “삼각산이 이러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룡소슴”치는 것과 같은 감격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는 그때 어디에 있었나?
독립 선언을 울리는 종소리, 북을 앞세워 만세를 부르며 행렬하는 동포들과 함께했다.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나?
그렇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만세 운동에 참가했고 3월 5일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투옥 당시 신문(訊問) 내용만 보아도 독립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알 수 있다.
신문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민족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고 독립해 정치하는 것인데, 조선도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일가 단란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교육 제도가 불완전한 까닭으로 조선인은 생존 경쟁의 패자가 되어 마침내 일본인의 노예가 되게 되었다. 또 조선에 대한 정치는 무단 정치로서 문관까지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조선인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또 동양척식회사 등을 설립하여 마치 영국이 인도에서 동인도주식회사와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불평이 있으므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선처를 빌지는 않았는가?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기회만 있으면 또 할 것이다.”
이 신문의 결과는 무엇이었나?
7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심경을 쓴 글이 이 시집 맨 앞에 실린 <감옥에서 어머님께 인 글월>이다.
형을 마치고서는 무엇을 했나?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극문학을 공부한다. 귀국 후에 최승일, 안석주와 함께 ‘극문회(劇文會)’를 결성하고,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쓰고 각색하며 감독했다.
영화나 극예술은 그의 민족의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직접 참여에서 민족 계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영화나 극예술이 민족의 계몽과 개화, 의식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보았다.
신문 기자의 길을 택한 것도 민족 계몽인가?
그렇다. 구국 항일 전선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대신에 필력을 통해 민족의 자유와 독립, 자강의 길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가 계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인가?
위의 3.1운동 당시 신문 내용을 보아도 우리가 일본의 노예가 된 이유는 교육 제도가 불완전한 탓이라고 했다. 당시 이미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교육에 대한 심훈의 생각은 무엇인가?
<조선의 영웅>이란 글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야학당 선생들을 조선의 영웅으로 칭한다. 그들을 “직접으로 도와줄 시간과 자유가 아울러 없는 나로서는 양심의 고통을 느낄 때가 많다”고 고백한다.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돌 기념 현상 모집에 당선하자 상금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살다 갔나?
1901년 태어났다. 본명은 ‘대섭(大燮)’이나 1926년부터 아호 ‘훈(熏)’을 썼다. 시인이자 소설가, 극예술인,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36년 사망했다.
이 시집은 어떻게 엮었나?
심훈이 생전에 출간하려 정리한 ≪심훈 시가집(그날이 오면)≫ 검열본을 바탕으로 하고 그 외 발표작들을 추가했다. 처음 발표된 형태를 그대로 살리고 시인이 육필로 직접 수정한 내용을 반영했다.
당신이 만난 심훈은 무엇인가?
‘자기 검열의 지성’이다. 평생 ‘행동하는 양심’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했다. 문학이라는 매개로 민족의 계몽과 각성을 통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염원했던 저항 시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도식이다. 강원대학교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