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오규원 시선
지만지 한국 근현대시문학선집 신간, ≪초판본 오규원 시선≫
한국 시의 레알
오규원은 시에 협찬 광고를 싣는다. 광고주는 자본주의, 광고 모델은 브랜드, 광고 메시지는 물신성이다. 본방 따로, 광고 따로 가는 정직한 광고는 아니다. 드라마 안에 슬쩍 끼워 넣는 프로덕트 플레이스먼트 애드버타이즈먼트, 곧 간접광고다. 명민한, 그러나 비열한 방법으로 그는 얼마나 벌었을까? 부자가 됐을까? 우리가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지?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1.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 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3. 빙그레!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를 들고 있다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4. ⇨
5. ⇨를 따라
한 모서리를 돌면
빙그레−가 없다
다른 세계이다
6. ⇧ 따르는 곳을 따르지 않고
거부한다
다른 모서리로 내 다리를
내가 놓는 오월의 음지를
내가 앉는 의자의
모형을 조금씩 더
옮긴다… 이 地上
이 地上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초판본 오규원 시선≫, 오규원 지음, 이연승 옮김, 85∼86쪽
시가 왜 이런가?
일명 광고시다. 광고 내용을 시에 끌고 왔다.
이 시로 뭘 하고 있는가?
현실의 부정성에 대한 미적 성찰, 언어와 시에 대한 고정관념 해체다.
빙그레 광고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언어가 광고다. 오규원은 시에프, 비디오, 잡지 광고 글을 시에 그대로 인용한다.
문명 비판인가?
타락한 세계에 대한 방법적 응전이다. 그 세계의 화법을 그대로 이용한다.
순수한 문학 언어는 아닌 듯싶은데?
그러기에는 세계가 너무 타락했다. 세계와 자아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 주는 것이 더 절박했다.
오규원은 누구인가?
‘날이미지 시론’으로 한국 현대 모더니즘 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날이미지 시론이란?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관념을 생성하는 수사법을 배제한다.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주장한 ‘날이미지론’이다.
출발점은 어디인가?
처음부터 관념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데 주력했다. 1990년대 이후 은유적 사고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통해 환유적 시 쓰기로 전환한다.
시가 시 자체를 생각하는 것인가?
기의를 상실하고 기표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다. 시의 현상적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 시인에게 새로운 작업으로 떠올랐다.
오규원의 방법은 무엇이었나?
‘현상’에 대한 시의 탐구가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1995년 발간된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는 이전 시집과 분명히 구분된다.
뭐라고 했나?
자서에서 “모든 존재는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 참된 의미에서, 모든 존재의 언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도 그 현상의 하나이다”라고 썼다.
언어의 광의 해석인가?
언어를 진리, 혹은 현실을 반영하는 관념,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 자체로 절대를 드러낸다고 판단했다.
시의 목적은 뭔가?
일체의 목적의식에서 벗어나 시를 쓰려 했다.
결국 언어는 무엇을 결과했는가?
언어에 대한 역동적인 인식을 통해 다양한 수사 장치를 만들어 냈다. 현대적 기획을 실천한 것이다.
어떤 수사 장치를 개발했는가?
아이러니, 우화, 알레고리, 패러디.
장치 없이 시를 쓸 수 없을까?
전통적인 시 양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계가 복잡하고 추악하게 뒤틀려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시인이 고안한 새로운 시 양식이다.
장치는 그의 시에서 기능을 입증했는가?
우회적이긴 해도 현실에 대한 간접 비판이자 시의 주체가 취할 수 있는 극한의 비판 방식이다.
비판의 대상은?
세계의 물신화는 주체를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거나 분열시킨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시 쓰기는 이의 비판이다.
오규원의 언어 의식은?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다. 언어의 관념성이나 도구성을 경계했다. 이것이 시 쓰기에 끊임없이 반영된다.
그는 문학에서 뭘 거두었나?
시와 시론에서 동시에 두각을 나타냈다. 독보적이다. 날이미지 시를 구사하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정교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했다. 시학의 구체적 원리와 방법론을 보여 주는 성과다.
언제부터 문학을 만났을까?
중학교 시절 대본집을 드나들며 번안소설과 대중소설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상상의 세계에 충격을 받았다. 사범학교 2학년 말에 잡지에 투고한 <밤>이라는 시가 뽑힌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3학년 무렵부터 스스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전봉건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 릴케의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를 접한다.
등단은?
1965년에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김현승의 추천을 받으면서 데뷔한다.
초기 시의 특징은?
시 언어가 구체 현실 세계를 모방하지 않는다. 매우 비유적이고 수사적이다.
원인은?
예술이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언어를 통해서만 현실을 조망할 수 있다는 시인 특유의 자의식에서 파생됐다. 언어를 매개로 관념과 사물을 자신의 시 공간 속에 새롭게 만들어 간다.
전환점은?
≪분명한 사건≫(1971)과 ≪순례≫(1973)를 내고 난 뒤 자신의 관념성을 반성하면서 변모한다.
관념성의 반성은 쉽지 않은 과업인데?
초기 시에 대해 시는 얻었으되 ‘삶’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관념 속에서 언어와 삶을 추상화함으로써 시에 현실의 음영을 틈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딜레마는 어떻게 확인되는가?
≪길 밖의 세상≫에 이렇게 썼다. “내가 ≪분명한 사건≫을 쓸 무렵에는 내 의식은 비교적 순수했어요. 허나 대상을 명확히 묘사하려고 할 때, 언어는 항상 대상의 편이 되어 ‘나’로부터 멀어져 갔지요. 결국 ‘나’는 자신이 틈입할 수 있는 글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분명한 사건≫의 언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한해서는 ‘나’의 편이었지만, ‘나’ 자신의 삶을 표백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나’를 배반하고 있었지요.”
반성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나?
관념의 개념적 인식에서 탈피해 현실로 무게중심을 옮겨 가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1978년에 출간된 세 번째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부터 개봉동, 양평동, 영등포 같은 구체적인 공간이 거론되기 시작하는 게 그런 변화 중 하나다.
현실을 인정한 셈인가?
부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수락하지는 않는다. 받아들이기도, 무시하기도 힘든 현실의 이중성을 문제 삼으며 그 억압당하는 삶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시인들>이라는 시에서 시대를 구실 삼아 편안히 시를 쓰는 행위, ‘제복’을 입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수동적인 행위를 질타하며 이후 자신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예고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연승이다. 이화여대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초빙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