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완희 시선 초판본
지만지 4월의 신간 3. 한반도에서 계급과 민족의 우열
강정구가 엮은 ≪초판본 유완희 시선≫
그때 우리에게 민족과 계급의 문제
자본은 착취하고 일본은 수탈한다. 자본은 공장을 만들고 일본은 군대를 만든다. 그때 우리는 누구와 싸운 것일까?
봄은 되얏다면서도 아즉도 겨울과 작별을 짓지 못한 채
-낡은 민족의 잠들어 잇는 저자 우예
새벽을 알리는 工場의 첫 고동 소리가
그래도 세차게 검푸른 한울을 치바드며
三十萬 백성의 귓겻에 울어 나기 시작할 ㅼㅐ
목도 메다 치여 죽은 남편의 상식 상을
밋처 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려온
애젊은 안악네의 갓븐 숨소리야말로…
惡魔의 굴속 가튼 作業物 안에서
무릅을 굽힌 채 고개 한 번 돌니지 못하고
열두 時間이란 그동안을 보내는 것만 하야도-오히려 진저리 나거든
징글징글한 監督 놈의 음침한 눈짓이라니…
그래도 그놈의 을 바더야 한다는 이놈의 世上-
오오 祖上이여! 남의 남편이여!
왜 당신은 이놈의 世上을 그대로 두고 가셧습닛가?
-안해를 말리고 자식을 애태우는…
<여직공(女職工)> 전문, ≪초판본 유완희 시선≫, 강정구 엮음, 5~6쪽
프로문학인가?
이 시인은 여직공을 계급 주체로 등장시킨 것이 아니다.
여직공이 계급 주체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민족의 일원이다.
어째서 그런가?
“낡은 민족의 잠들어 잇는 저자 우예/ 새벽을 알리는 工場의 첫 고동 소리가/ 그래도 세차게 검푸른 한울을 치바드며/ 三十萬 백성의 귓겻에 울어나기 시작할 ㅼㅐ”라는 구절을 보라.
여직공과 공장은 노동자의 현실 아닌가?
이 시에서 여직공이 억압받는 현실은 개인적·계급적 이유가 아니다.
노동자의 피압이 계급에서 비롯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시가 다루는 현실에서 노동자가 받는 억압은 계급의 차이가 아니라 민족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이 시인의 다른 시편에서도 이런 인식이 확인되는가?
<오즉 전진(前進)하라!>를 보자. “너에는 과연 너에의 겨레를 사랑할 만한 그만한 아량을 가졋섯느냐?”라고 하면서 ‘겨레’ 또는 민족 차원에서 변혁과 투쟁을 살핀다.
민족 차원의 투쟁은 무엇을 추구하나?
일제에 억압받는 민중의 민족 해방이다.
유완희는 프로 작가가 아닌가?
가입을 하지 않았지만 프로문학을 따르는 동반 작가로 알려졌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위험한 평가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모두 프로문학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무엇이 위험한가?
프로문학의 잣대로 보면 그가 시도한 비판은 사회주의 문학의 주변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프로문학의 잣대가 위험하다면 그를 보는 정확한 잣대는 무엇인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는 문학적 노력, 그 자체를 봐야 한다.
그를 프로문학 일반과 구별하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사유의 중심에 계급이 아니라 민족이 있다.
증거가 있는가?
프로문학이 대세이던 1920년대에 서정시를 여러 편 발표해 민족을 노래했다.
어떤 시가 그러한가?
<가을>의 “가는 네야 아조 간다만 오는 님이야 언제나 오시리” 같은 구절은 프로문학의 이념과 강령에 묶여 있다면 쓸 수 없었다. <단장(斷腸)>의 “내 사나히로 이 나라 百姓 되고 네 으로 香氣런 되어/ 내 할 일 업고 네 한 그 潔白을 자랑할 몸”도 이 시인이 민족 단위의 상상력을 지녔음을 암시한다.
당신은 이 시집을 왜 엮었나?
프로문학과 우파 민족주의라는 이분법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시인을 알리고 싶었다. 이 시집을 시작으로 유완희 시인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나오길 바란다.
유완희는 누구인가?
1920∼1930년대에 활동한 시인이다. 1901년 태어나 1964년 타계했다.
왜 이리 낯선가?
남아 있는 시집이 없다. 이념 문제로 연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 시집은 어떻게 엮었나?
활동 당시의 신문 지면을 샅샅이 뒤졌다. 오래된 지면을 판독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결했나?
다행히 시인의 유가족과 소식이 닿았다. 유가족이 제공한 육필 원고 덕분에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강정구다. 제2회 ≪문학수첩≫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