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이광수 소설선
김종회가 엮은 ≪초판본 이광수 소설선≫
P는 남자러라
장편의 작가 이광수가 윤광호를 주인공으로 동명의 단편을 썼다. 마음을 통할 따뜻한 애정을 찾지만 P는 거부한다. 100년쯤 전 이야기다.
이때에 光浩는 P라는 한 사람을 보았다. 光浩의 全 精神은 不識不知間에 P에게로 옮았다. P의 얼굴과 그 위에 눈과 코와 눈썹과 P의 몸과 옷과 P의 語聲과 P의 걸음걸이와… 모든 P에 關한 것은 하나도 光浩의 熱烈한 사랑을 끌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 光浩는 힘 있는 대로 P를 볼 기회를 짓고 힘 있는 대로 P와 말할 機會를 지으려 한다.
<윤광호>, ≪초판본 이광수 소설선≫, 이광수 지음, 김종회 엮음, 149쪽
소설 <윤광호>의 주인공 이름이 ‘윤광호’인가?
그렇다. 주인공 이름이 소설 제목인 경우는 서양에선 흔하지만 한국 현대문학에선 드문 편이다.
한국 현대문학 최초의 동성애 소설이 맞는가?
맞다. 최근 네티즌 블로거 사이에서 새삼 화제다.
이광수가 동성애 소설을 쓴 것이 언제인가?
거의 100년 전 작품이다. 그래서 주목하는 시선이 더 뜨거운 듯 싶다.
당시 부러울 것 없는 춘원이 왜 동성애 소설을 썼을까?
윤광호의 동성애는 마음을 소통할 ‘따뜻한 애정’을 찾아 헤맨다. 상대방에게 성적으로 직접 끌리는 요즘 동성애와는 다르다.
‘동성애 앓이’를 하다가 자살에 이르는 괴로운 인생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단절과 불통의 비극을 보여 주는 데 동성애를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윤광호>는 어떤 이야기인가?
그는 동경 K대학 경제과 2년급 학생이다. 특대생으로서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조선인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으려 공부하고 있다. 어느 날 그 앞에 ‘P’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윤광호는 그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거부당한 뒤 결국 자살에 이른다.
P는 분명히 남자인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P가 남자라는 사실을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문맥상 남자일 것이라는 추측은 들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동성애라고 확정할 수 있는가?
소설 결미에 이르러 확실히 밝힌다. ‘P는 남자러라’라고 한다. 반전 효과를 노린 것 같다.
이 책 ≪초판본 이광수 소설선≫에는 어떤 작품이 있나?
<윤광호> 말고도 <어린 희생>, <무정>, <소년의 비애> 등을 실었다. 초기작 위주로 괄목할 만한 중·단편 8편을 골랐다.
<어린 희생>은 어떤 작품인가?
러시아군과 싸우다가 소년이 죽는 이야기다.
러시아군은 왜 등장하는가?
서양 소설의 번안 같다.
소년은 한국인인가?
아니다. 1773년, 어느 서양인들이 러시아군과 싸운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은 소년이 러시아 병사들과 격투를 벌이다 죽고 할아버지는 러시아 병사들에게 독주(毒酒)를 제공, 그들을 죽인다.
서양 소년 이야기를 이광수가 왜 들고 나온 것인가?
<어린 희생>은 당시 그의 세계관을 보여 준다.
러일전쟁 문제인가?
5년 뒤에 나온 작품인데, 러시아를 적대 세력으로 설정했다. 이광수의 정치 성향과 방향성을 분별할 수 있다.
<무정>은 장편 ≪무정≫과 다른 작품인가?
이 책에 수록한 <무정>은 1910년에 나온 단편이다. 작품 말미에는 “마땅히 장편이 될 재료로되 학보에 게재키 위하여 경개만 서(書)한 것이니 독자 제씨는 양찰”하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완전한 줄거리가 아니고 이야기의 들머리만 늘어놓은 작품이다. 장편 ≪무정≫은 1917년에 발표되었다.
단편 <무정>은 어떤 이야기인가?
주인공은 어리고 무책임한 남편을 만난다. 급기야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무정’이라는 제목은 인정이 없다는 뜻인가?
봉건적 제도의 악습 아래 인정의 토대조차 세우지 못하는 삶, 인정이 없는 무정한 삶의 형식을 말하는 듯하다.
장편 ≪무정≫과 단편 <무정>은 무엇이 다른가?
둘 다 봉건적 결혼 문제를 비판한다. 그러나 결말이 다르다.
뭐가 다른가?
단편 <무정>은 비극적 결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장편 ≪무정≫에서는 이 문제들이 ‘새 시대’를 맞아 해결될 듯 암시한다.
시대가 인정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나?
여기서 이광수가 생각한 ‘무정’은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한 표현으로 읽힌다.
중편 <무명>은 작가의 체험 소설인가?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다. 1937년의 일이다. 소설은 작중 화자 ‘나’가 병감으로 이감되어 감옥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관찰한 이야기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동료 수인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박애주의자이며 감방 안의 삶을 통해 세상을 제유법적으로 판단하려는 이성적 인물이다.
투옥은 작가에게 무엇이었나?
수양동우회 사건은 일제가 지식인 ‘전향’을 목적으로 꾸민 표적수사 사건이다. 이광수는 재판 도중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한다.
가야마 미쓰로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신책 아니겠나.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으나 반년 만에 석방됐다.
석방 후 미쓰로의 행보는 무엇인가?
적극 친일의 길을 걷는다. 일제는 성공했다. <무명>은 6개월치 감옥 체험의 반영이다.
그는 단편도 많이 썼나?
단편보다 장편이 더 많다. 장편 작가로 분류되는데, 장편의 주제론적 성취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 스스로는 자신의 단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이광수 스스로 자신의 초기 단편은 ‘불완전하고 미숙하다’고 인정했다. 그렇긴 하지만 초기 단편 역시 당시로서는 선구적이었으며 가장 현대적이고 참신한 문장이었다. 단편소설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 그 정도의 소설을 썼다는 점만으로도 선구적이다.
당신은 누군가?
김종회다. 경희대 국어국문과 교수이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