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이기영 단편집
카프, 계급주의 문학, 한국 소설 소개 <<초판본 이기영 단편집>>
카프의 리얼리즘
계급투쟁을 말하는 지식인이 행동까지 성취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의 계급이 투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고 곧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지식이다. 만일 그가 말이 아니라 삶을 믿는다면 즉시 알게 된다. 부정은 긍정이고 긍정은 부정에 의해서만 리얼하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쥐불을 놋는 어룬은 업섯다. 그러나 하필 쥐불뿐이랴! 마을 사람들의 살림은 해마다 주러드는 것 같엇다.
사실 그들은 모두 경황이 업서보인다. 수염이 대자 오 치라도 먹어야 량반 노릇을 한다고 ― 가난한 량반은 량반도 소용업섯다. 올 정월에 떡을 친 집도 몃 집 못 된다. 그러니 쥐불이랴? 세상은 점점 개명을 한다는데 사람 살기는 해마다 더 곤란하니 웬일인가?
<서화(鼠火)>, ≪이기영 단편집≫, 노현주 엮음, 83~84쪽
어떤 작품인가?
이기영이 1933년 발표한 <서화(鼠火)>, 곧 쥐불놀이라는 중편이다.
이번에 실린 작품은?
<호외>, <조희 는 사람들>, <서화>다. 1927년, 1930년, 1933년에 쓴 작품이다.
농민 소설가 아니었나?
대표작 ≪고향≫이 농민 소설이고, 농촌 배경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노동자 소설, 지식인 소설, 이념 소설도 많다.
여기 실린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가?
<호외>와 <조희 는 사람들>은 근대 산업구조 이행 초기의 공장 형태와 노동자를 그린다.
<호외>는 어떤 이야기인가?
초기 작품이다. 공장 노동자의 조합 활동과 파업 과정을 그린다.
계급의식인가?
추상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노동자 세계를 입체로 구성한다.
입체란 무슨 의미인가?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를 단순 미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짧은 소설에서 노동자는 열성 조합원, 스파이로 의심되는 조합원, 감독 편 노동자, 새로이 계급의식을 각성하는 노동자로 분화된다.
노동계급의 분화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노동 현장에서 나온다. 이론에 등장하는 노동계급과 그것의 이상화가 아니다. 노동자의 실체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에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조희 는 사람들>는 무엇을 말하나?
진보 지식인에 의해 계급의식에 눈뜨고 단결해 자본가에 맞서는 제지 공장촌 노동자의 이야기다. 실감 나는 현장 묘사는 이기영의 장점이다.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종이 뜨는 작업의 스탠스는 뭔가?
생산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근대 기계식 공장도 아니고 농촌 풍경도 아닌 생산 과정, 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의지다.
어떤 구체성인가?
작업은 수공업과 분업으로 구성된다. 임금 투쟁은 노동자와 공장주의 갈등 관계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그와는 다른 특정 형태의 생산관계를 만든다.
식민지 근대를 말하는 것인가?
물주를 중심으로 소규모 수공업 공장이 나타났다. 이것이 일본의 대자본 회사 노동자로 편입되고 지위와 경제 여건은 점점 더 나빠진다.
민족자본의 형해화 과정인가?
초기 전근대 공장 형태가 스스로 발전하지 못했던 상황을 매우 실감 나게 형상한다.
이기영은 어떤 작가인가?
일제 강점기 카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이론 논쟁에 빠지지 않고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문학 실천을 보여 주었다.
작품 수가 많아서 카프 문학의 대표자라는 것인가?
이론을 작품에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탁월한 리얼리즘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탁월한 리얼리즘의 예를 들면?
농촌 소재 작품을 보면 풍속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하위 계층의 현장 언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념과 이론의 생경한 흔적을 지우되 비판적이고 고발적인 시각을 살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나?
일제하에서 창작한 작품만도 90여 편이다. 이정도면 계급주의 문학 이론을 작품으로 실현했다는 주장은 무리가 아니다.
월북작가의 불이익은 여전한가?
그는 월북해서 ≪땅≫, ≪두만강≫ 등 북한의 대표작을 썼다. 북한 문학예술 고위직도 맡았다. 일제 강점기 이기영 문학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던 배경이다.
그의 작품 경로는?
1925년 카프에 들어가면서 불이 붙는다. 초기에는 영웅적 주인공을 내세워 계급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계몽주의를 표방했다. 1927년 카프 제1차 방향 전환기에는 계급의식이 없던 인물이 무산자로서 계급의식을 각성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1930년대 들어서는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과 함께 계급투쟁의 실천을 부각한다.
계급투쟁의 실천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실천되는가?
작품에 등장하는 노동자, 농민이 진보 지식인을 통해 자신의 계급 위치를 각성한다. 계급의식을 갖게 된 뒤에는 자본가에 대한 전선을 구축하고 파업을 감행하거나 지주에 대항해 단결된 행동을 보여 준다. 의식 각성 차원에 머물지 않고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보여 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노현주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강의한다. 문학의 정치 역할을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