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상 작품집
박연옥이 엮은 ≪초판본 이익상 작품집≫
실패를 선택하다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지 못하는 나, 식민지 지식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든 명예와 공리는 비열과 모멸이므로 농촌으로 은둔하거나 도시의 생활인이 된다. 실패를 선택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나는 ‘테로리스트’가 되지 못하엿다. 그러한 모험할 성격이 업는 것은 큰 유감이다. 명예와 공리만을 위하야 인간의 참생활에서 거리가 너무나 머른 단적(端的) 문제만에 구니(拘泥)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과는 언제지든지 길을 가티할 수 업다. 나는 그러한 비열(卑劣)한 생활 수단을 취하야 사회뎍으로 성공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긔 량심을 속이지 안코 진실(眞實)한 내면(內面)의 요구에 응(應)하기 위(爲)하야는 사회뎍으로 실패자(失敗者)가 됨을 도리혀 깃버한다.
<흙의 세례>, ≪초판본 이익상 작품집≫, 이익상 지음, 박연옥 엮음, 43~44쪽
‘나’는 누구인가?
주인공 명호다. 사회에 불만이지만 ‘테로리스트’가 되지 못해 유감이다.
언제 일인가?
일제 강점기다.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명호의 다음 선택은 무엇인가?
명예와 공리만을 위해 ‘참생활과 거리가 먼 문제’를 내세우지 않기로 한다. 차라리 사회적으로 실패한 자가 되어 스스로의 내면세계에서 진실을 찾는다.
어떻게 진실을 찾는가?
귀농한다. 아내 혜정과 함께 시골로 떠났다.
귀농의 목적이 무엇인가?
번잡스러운 도회 생활을 정리하고 자연 친화적 삶을 살기 위해서다.
현실 도피인가?
그렇다. 부부는 농사일에 능숙지 못하다. 봄이 다 가도록 밭을 갈지 못한다.
농사에 서툰 농부의 농사는 어떻게 되는가?
삯일꾼을 구하지 못했다고 아내가 발을 구른다. 명호는 자기가 밭을 갈겠다고 들로 나선다. 생애 처음으로 밭을 간다. 일을 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부부는 시골 생활에 성공하는가?
농사일로 얻은 위안은 잠깐에 불과했다. 친구 부부의 사회적 성공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게 된다. 명호와 혜정은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피로해짐을 느낀다.
귀농하는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무엇인가?
생활을 새롭게 타개하기 위해 귀농하는 지식인을 ‘실패자’, ‘낙오자’라 호명한다. 작가 이익상은 감상적인 귀농과 전원생활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위에 인용한 단편 <흙의 세례>에서도 귀농의 자기모순과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농촌 생활은 ‘손이 하얀’ 지식인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지식인은 어떤 처지였나?
식민지 시대 민족 수난과 함께 사상 투쟁의 어지러움에 시달렸다.
사상 투쟁은 누구와 누구의 투쟁인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지리멸렬한 투쟁이었다.
이익상의 인물은 어느 편인가?
사상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그들과 단절하려 했다. 진보 좌파 진영의 현실감 없는 강경 노선에 반감을 느꼈다. 명호는 번민 끝에 차라리 ‘실패자’가 되더라도 그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겠다고 결의한다. 그래서 농촌에 은둔한다.
도시에 남은 지식인은 무엇이 되었나?
생활인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 작품집에 실린 또 다른 단편 <그믐날>에 잘 묘사된다.
생활인이 된 지식인은 어떤 모습인가?
신문사에 근무하는 주인공 성호는 월급이 밀려 생활고를 겪는다. 하지만 정작 월급이 나오자 사치성 소비재를 충동 구매한다.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되어 타협한다.
이익상은 귀농 지식인인가?
<그믐날>의 성호에 가깝다. 이 단편은 언론인 출신인 이익상의 자전적 작품이다.
그는 어떤 길을 걸었나?
1918년에서 1922년 사이 일본에서 유학하다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접했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작가 나카니시 이노스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5년에는 본격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목적으로 했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듬해 돌연 탈퇴한다. 이후 작가, 언론인, 문화운동가로 활동했다.
<카프> 탈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테러리스트와 은둔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했던 모습이 드러난다. 성격상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투사도 될 수 없었고, 귀농도 탈출구가 아니었다.
그의 소설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익상은 스스로의 고민을 작품 속에 담았다. 하지만 지식인에 국한하지는 않았다. 번뇌의 밤을 보내는 식민지민들, 즉 하층민, 조혼 여성, 기생 같은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작품에 묘사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연옥이다. 문학비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