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이태준 단편집
한국 문학, 현대 단편 소설 ≪초판본 이태준 단편집≫
여보? 어디 게슈?
1925년에 등단한 이태준은 1939년에 ≪문장≫을 창간한다. 1946년에 월북하고 한국전쟁 때는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1952년부터 사상을 검토당하다 1956년 숙청되었다고 한다. 행적 불명이고 사망 연도도 알 수 없다. 세상을 연민하던 조선의 문사는 지금 어디 있을까?
“여보? 어디 게슈?”
하는 안해의 찾는 소리가 난다. 내다보니 얼굴이 종이짱처럼 해쓱해진 안해는 두 손이 피투성이다.
“응!”
“물 좀 떠 줘요.”
“웬 피유?”
안해의 표정을 상실한 얼굴은 억지로 찧끼여 우슴을 짓는다. 피투성이 두 손은 부들부들 떤다. 현의 안해는 시칼을 가지고 어떻게 잡았는지, 토끼 가죽을 두 마리나 벗겨 놓은 것이다. 현은 머리칼이 쭈뼛 솟았다.
“당신더러 누가 지금 이런 짓 허래우?”
“안험 어떻허우? 태중은 뭐 지냇수? 어서 손 싯게 물 좀 떠 놔요.”
하고 안해는 토끼털과 선지피가 엉키인 두 손을 쩍 벌려 내여민다. 현의 머리속은 불현듯, 죽은 닭의 눈을 신문지로 가려놓고야 썰던 안해의 그전 모습이 지내친다. 콧날이 찌르르하며 눈이 어두어졌다.
피투성이의 쩍 버린 열 손가락, 생각하면 그것은 실상 자기에게 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였다. 현은 펄석 주저앉을 듯이 먼 산마루를 쳐다보았다. 산마루엔 구름만 허−옇게 떠 있었다.
≪초판본 이태준 단편집≫, <토끼 이야기>, 이태준 지음, 문흥술 엮음, 125~126쪽
쇼킹한 대목인데 왜 이 구절을 골라 보여 주는가?
<토끼 이야기>의 한 대목. 임신한 아내가 토끼를 죽인 후 현에게 물을 떠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다. 기가 막힌 상황에 주인공은 ‘펄석 주저앉고’ 만다. 이 심경은 일제에 억눌려 살면서 모든 것을 체념한 지식인의 태도를 대표한다.
≪초판본 이태준 단편집≫은 어떤 책인가?
해방 이전에 활발히 활동하다 월북한 작가 이태준의 중·단편 여섯 작품을 모았다. 발표 당시의 표기법 그대로 실었다. <달밤>, <가마귀>, <복덕방>, <농군>, <토끼 이야기>, <해방 전후>다.
그의 단편소설이 서정적이라는 주장은 사실인가?
<달밤>에 그런 측면이 보인다. 성북동 시골 마을 사람 황수건 이야기다. 그는 천진한 품성을 가진 ‘반편’이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마다 꼬이는데도 낙천적인 모습을 보인다. 서술자는 ‘반편’ 같은 황수건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없던 ‘재미’를 느낀다.
그는 왜 ‘반편’을 이야기하는가?
약삭빠르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황수건처럼 우둔하고 천진하게 사는 일이야말로 사람다운 삶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가마귀>는 제목처럼 어두운 소설인가?
소설이 지녀야 하는 서사성, 즉 인물 형상화나 구성보다는 분위기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음습한 별장, 반복되는 까마귀 소리, 폐병 환자인 여인에 대한 묘사 등이 어우러져 분위기가 어둡고 침침하다. 일상에서 소외된 작가인 ‘그’가 폐병 환자인 여인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말미에선 여인이 끝내 사망하면서 비극적 분위기가 더해진다.
까마귀는 뭘 하는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으로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비극적 애상성을 한층 강조한다.
이태준 단편소설의 서정적 진수를 가장 잘 나타냈다는 그 작품인가?
여인의 폐병, 여인을 사랑하는 정혼자의 사랑, 여인에 대한 감정 등을 상고주의적이면서도 서구 지향적인 미의식으로 그렸다. 절제된 연민의 시선과 태도가 돋보인다.
<복덕방>에 등장하는 ‘인생 패배자’는 누구인가?
이 작품의 배경인 복덕방에는 노인 세 명이 등장한다. 서 참의는 과거 대한제국군 장교였으나 국권피탈로 실직하고 복덕방을 한다. 안 초시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면서 딸에게 무시당하고 산다. 박희완 영감은 대서업을 하려고 일본어를 공부하나 잘 안 된다. 서 참의는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그나마 경제적 기반을 쌓아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게 된다. 안 초시는 말끝마다 ‘젠장’ 소리를 달고 사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다. 서 참의와 안 초시가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고, 박 영감은 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다.
안 초시가 궁금해지는데?
실패를 많이 하다 보니 일확천금의 꿈이 크다. 그래서 신항구 건설계획 소문을 듣고 거액을 투입했다가 다 잃고 만다. 낙담한 나머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딸이 문제 인물이다.
안경화라고 당대 유명한 무용가인데, 평소 아버지를 무시해 온 터다. 아버지가 자살하자 자신의 명예 문제부터 걱정한다.
장례는 어떻게 이용되는가?
안 초시 주검을 처음 발견한 서 참의가 가장 먼저 안경화에게 알린다. 서 참의는 안경화를 나름대로 훈계한 뒤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게 한다. 경찰에는 알리지 않는다. 많은 문상객이 왔는데 대부분 안경화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두 노인은 장례식장의 문상객들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 그냥 자리를 뜬다.
<농군>이 사실 왜곡 논란에 휩싸인 이유는?
1931년 만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완바오 산 사건을 다뤘다. 그런데 가해자-피해자 문제와 먼저 공격한 세력 묘사 등을 거꾸로 해 놓은 감이 있다. 완바오 산 사건은 만주 토착민과 조선에서 이주한 농민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완바오 산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은 벼농사에 필요한 수로(水路)를 파기 시작했다. 수로 공사로 피해를 입은 인근 중국 농민들이 조선 농민을 당국에 고발하고 나아가 수로와 제방을 파괴한다.
사태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일본이 먼저 나섰다. 조선 농민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현지에 주둔하던 일본 경찰이 중국 농민들에게 먼저 총을 쐈다. 일본 경찰의 진심은 ‘보호’가 아니었다. 만주 침공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평가된다. 일제 당국은 이 사건을 중국인의 일방적인 만행으로 왜곡 보도했다. 이 때문에 한때 조선에서는 중국인 배척 테러가 횡행했다.
이태준의 의도는?
줄곧 순수문학을 견지해 오던 작가는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조선 농민의 끈질긴 생명력을 형상화하면서 현실 문제를 담으려 했다. 그런데 작품 내용은 일제 당국의 선전대로 중국인이 일방적으로 폭력을 일으킨 것처럼 나온다.
왜곡의 원인이 뭔가?
당대의 정보 통제, 검열에 있다. 한편으로는 작가의 현실 인식이 너무 소박한 데도 원인이 있다. 결국 사실 왜곡으로 일제의 야욕에 부합한 감이 있다. 진상을 알았다면 이렇게 쓰진 않았을 것이다.
<토끼 이야기>는 자전적 소설인가?
작가 스스로 ‘심경(心境)소설’이라 부른 작품이다. 1940년대, 조선어 신문들이 폐간되자 실직한 전직 기자 현은 토끼를 길러 생계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사료가 비싸 토끼 40여 마리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판에 부딪친다. 팔려고 했지만 판매 경로가 여의치 않다. 결국 도살해야 되는데 백면서생 현은 그럴 용기가 없다. 임신한 아내가 일을 해치운다. 생활 전선에 쫓긴 아내는 못할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해방 전후>도 자전 소설인가?
1946년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이태준의 거친 삶의 모습이 직접 노출되어 있다. 작품을 보면 일제 말기, 작가 현은 서울 집을 떠나 강원도 산골로 소개(疏開)를 간다. 난세의 피난처를 찾아간 것이지만 그곳에도 면장·순사 등 일제 앞잡이들이 있어 마음이 괴로웠다. 해방을 맞아 친구의 전보를 받고 상경,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찾아간다. 이후엔 전국문학자대회 이야기, 신탁통치를 둘러싼 문인들의 입장 등의 내용이 나온다.
작품 속에서 해방 공간이란?
김 직원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주주의 경향과 사회주의 편에 서는 현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당대 갈등 양상의 전형이다. 현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민족적 단결과 통합을 기대한다. 조직적 단체의 구성을 강행하려는 젊은 공산주의 문필가들을 오히려 나무라고 민주 진영과 통합하자고 역설한다. 현이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보여 준다.
이건 곧 이태준의 사상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려는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런데 남북 분단이 고착하면서 남쪽에서는 용공으로 간주됐다. 월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쪽에서마저 부르주아적 사고로 지탄받아 결국 숙청의 빌미가 되고 만다.
이태준은 어떤 인물인가?
호는 상허(尙虛),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이다.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방황하다가 주위 사람들의 배려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학교 비리에 항의하는 동맹휴교에 가담했다 퇴학당한다. 1927년 도쿄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가 1928년 중퇴한다.
데뷔는?
1925년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 입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개벽≫에 입사한 후 ≪학생≫,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관여했다. 아울러 ≪어린이≫에 수필과 소년 독본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다. ≪조선중앙일보≫에서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지를 창간하여 책임 편집을 맡는다.
해방 후 월북했다는데?
해방 후 좌익 계열 문학 단체에 가담했고, 1946년 7∼8월경에 월북한다. 그해 10월엔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여행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1952년부터 사상 검토를 당하다가 1956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사망 연도도 불확실하다.
해방을 전후해 그의 작품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일제 강점기 당시 그의 작품은 대체로 현실에 초연한 예술 지상적 색채를 나타냈다.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묘사와 대상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통해 단편소설의 서정성과 그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발표했다. 일제 강점기 때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문흥술(文興述)이다.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