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이한직 시선
한국 시 신간, ≪초판본 이한직 시선≫
사막의 방울 소리
대지의 바다를 횡단하는 낙타의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 알갱이보다 더 많은 소리를 물길처럼 남기고 대상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가는 길은 언제나 돌아올 길이다. 이한직은 없는 것을 통해 있어야 할 것을 가리킨다.
이한직의 대표작은?
풍장이다.
風葬
砂丘 위에서는
胡弓을 뜯는
님프의 童話가 그립다
季節風이어
캬라반의 방울 소리를 실어다 다오
葬送譜도 없이
나는 砂丘 위에서
風葬이 되는구나
날마다 밤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워했다
깨어진 올갠이
杳然한 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葬送譜도 없이
나는 砂丘 위에서
風葬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초판본 이한직 시선≫, 이한직 지음, 이훈 엮음, 3∼4쪽.
풀어 보면?
‘풍장’은 말 그대로 시체를 버려두고 바람에 날려 자연히 사라지게 하는 장례법이다. 이 시는 이미 생을 마감한 자에 대한 일종의 조가(弔歌)다. 화자는 사막 가운데 팽개쳐져 살아갈 의미를 잃은 채 ‘님프의 동화’를 그리워하고 있다.
님프의 동화가 뭔가?
현실에 마모되기 이전, 기억 속에서만 더욱 찬연히 빛나는 처녀지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더 이상 음악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깨어진 올갠’뿐이다.
카라반 방울 소리는?
무언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아련하고 희미하게 들리는 사막 위의 카라반 방울 소리나 님프 호궁 소리처럼 사라질 듯한 잔향의 이미지를 사용해 효과적으로 감각화하고 있다.
이한직은 누구인가?
<낙타>라는 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시작한 유미주의 경향의 시인이다.
시풍은?
초기에는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시들을 주로 발표했고 해방 이후에는 평론 활동을 통해 당대의 논쟁에 참여했다.
시는 어떤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들이 현실의 촉수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무엇이 안타까웠나?
소중한 것들을 잊거나 버리고 살아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탓하는 우리에게 상실의 쓸쓸함이 배어 있는 그의 시는 망각된 그 무엇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한다.
그의 시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카로스다.
이카로스라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백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미궁을 탈출하려다 태양에 너무 근접하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왜 그것인가?
아버지는 아들에게 비행법을 설명한다. 너무 낮게 날면 바다에 빠져 죽고 너무 높게 날아도 추락한다. 그의 설명은 엄격한 생활의 법칙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을 살 때 태양으로 상징되는 이상향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살았나?
그게 밥 먹여 주냐는 말이 판단 잣대가 된 자본주의 시대에 이한직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태양은 무엇인가?
우리가 상실한 이상향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는 환상적이고도 이국적인 이미지를 필사적으로 찾아간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태양을 향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카로스의 후예다.
그의 시는 어디에서 영감을 찾는가?
아름다운 것들이 물러나고 사라지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환상은 아름답긴 하지만 생활적인 게 전혀 없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시는 이상향을 표현하기 위해 생활을 포기한다.
생활을 포기한 곳에 뭐가 남는가?
이한직 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문학이 현실에 패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름다운 환상이 얼마나 사라지기 쉬운지를 그의 시는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시는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결국 현실을 겨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살았나?
아버지가 친일파의 거두였다. 구한말에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고 국권피탈 이후에는 중추원 참의, 총독부 학무국장을 역임한 이진호다. 경제적으로는 유복했지만 해방 이후에는 몰락한 귀공자가 된다.
친일파 콤플렉스는?
친일파 2세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일본에 문정관으로 도일하기 전까지는 문단 활동을 활발히 했다. 청년문학가협회, 창공구락부, 한국시인협회 등의 창립에 관여했으며, 오영진, 박남수 등이 주재하던 ≪문학예술≫에서는 시 추천을 맡아 많은 신인들을 발굴, 양성했다. 1976년 일본에서 암으로 쓸쓸히 생을 마친다.
친일파 가문이라는 배경이 시에 나타났는가?
그는 친일파 가문이라는 배경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일본어 구사 실력이 뛰어났지만 우리말로 시를 써서 ≪문장≫에 투고한 이유다. 민족의식과 한글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민족의식은 일본인 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에게 이질감과 소외감을 안겨 주었다.
해방 이후의 삶은?
해방은 친일파 집안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시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나?
허무주의로 시에 영향을 끼친다. 시에 나타나는 좌절과 허무의 이미지가 그 흔적이다.
친일 문학가인가?
그는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여기에는 옥사한 윤동주를 비롯해 변영로, 오상순, 황석우, 이병기, 이희승,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이육사 정도가 포함된다.
등단은?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풍장>, <온실> 등을 발표했다.
정지용의 평은?
“패기가 있고 꿈도 슬픔도 넘치는 청춘 20대라야 쓸 수 있는 시”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동시에 “선이 활달하기는 하나 치밀하지 못하며 외래어의 잦은 사용”에 대해 조심할 것을 충고했다. 다른 시인들이 보여 주지 못한 독창성과 섬세한 감상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시어에 대한 보다 신중한 선택을 조언한 것이다.
시의 지향성은?
순수시를 쓰려 했다. 정치 지향성이 강한 경향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에 모두 반발했다. 테크닉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테크닉을 선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단의 시선은?
“기계적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 지금의 이곳을 떠나 보려는 출발에의 충동은 젊은 시절에 강렬한 법이지만 평생을 지속하는 여진”이라고 유종호는 평한다. 시에서 느껴지는 허무를 현실과 지향의 갈등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당대 시단에 대한 이한직의 관점은?
프로문학이라고 통칭되는 좌익 계열의 현실 참여 경향을 시의 본령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했다. 김기림으로 대표되는 한국 모더니즘 기법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아무런 비판 의식을 내재하지 못하는 편향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비판과 진단이 전달되었나?
몇 편의 평론과 추천기에서 나타난다. 이 책 뒤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어떤 내용인가?
문단에 대한 총평에서부터 논쟁을 점화하는 시론, 투고시에 대한 추천기들이다. 시에 대한 그의 관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에 대한 스탠스는?
좌익 계열의 현실 참여 경향은 지양하면서도 시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작품을 추천하고도 “허전한 구석이 남은 듯해 마음이 꺼림칙하다”며 작품에 시대정신이 결여된 데서 그 까닭을 찾는다거나 “그릇된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굶주림이 그날 시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데서 이런 관점이 보인다. 그는 시가 그저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가 그리는 세계는?
타락한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거리감과 상실감을 강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상실감에 시달리는 상황,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호소와 절규가 반복된다.
이국적인 어휘의 등장은?
현실과의 거리감을 확인시키는 장치다. 이런 이질적이고도 감각적인 언어로 손상되기 전인 태곳적 상황과 생명에 대한 강한 갈망을 드러낸다. 타락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혼탁한 현실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상기시켜 준다.
과작의 사유는?
해방 이후에는 오랫동안 붓을 놓았다. 문단 활동을 활발히 했으나 안정적인 직업을 얻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렸다. 1961년 민주당 정부 때 주일 문정관으로 임용되어 일본으로 갔다.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다 5.16 쿠데타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제출해 입국을 거부당했고 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다.
이한직과 관계있는 시인은 누구인가?
신경림이다. 이한직의 추천으로 ≪문학예술≫에 <낮달>, <갈대>, <석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밖에 임종국, 허만하 등이 있다.
신경림의 기억은?
신경림 시인은 추천 직후 술자리에서의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문학을 읽었는가. 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따위를 시위했던 것 같다. 역시 그는 웃으면서 듣기만 했고, 곁에서 박성룡 시인이 ‘이 사람 취했구먼’ 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 소리가 다 귀에 들리는데도 나는 자제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도중에 화장실 가서 꾸역꾸역 토하는 추태까지 벌였다. ‘술이 약하군’ 하면서 집에까지 잘 데려다 주라고 차비까지 주면서 박성룡 시인에게 이르는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내가 얼마나 술이 센가를 보여 주기 위해 내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