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임영조 시선
지만지 한국시문학선집 신간 <<초판본 임영조 시선>>
기대지 마라
성실한 직장인 임영조는 벽 보고 자리한 지 백일만에 말한다. “이제 알겠다, 내가 벽이다.” 돌아서면 내 등이 너의 벽이 되고 너의 등이 나의 벽이 되므로 들어갈 문도, 나설 문도 없다는 사실. 한 평생 제 영혼을 헹구며 살았다는 한 인간의 홀로서기, 기대지 않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孤島를 위하여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 같은.
≪초판본 임영조 시선≫, 임영조 지음, 윤송아 엮음, 118~119쪽
이 시인은 누구인가?
임영조다. 삶과 시, 일상과 초월, 대상과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적 긴장의 순간을 가장 적확하고 예리한 붓끝으로 통찰한 천생 시인이다.
어떻게 살았나?
그 자체가 구도자의 행보였다.
구도자의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시계추처럼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그에 버금가는 충만한 시적 세계를 선보이는가 하면 한순간 이소당(耳笑堂)으로 자리를 옮겨 오로지 시 쓰기의 고행에 온몸을 던지기도 했다.
무엇을 성취했는가?
인간 생활사와 자연 섭리의 표리를 두루 보듬어 안았다. 풍요하고 염결한 시 세계를 우직하게 완성했다.
이소당이 어디인가?
임영조 시작(詩作)의 절해고도다. 1994년에 오랜 회사 생활을 접고 동작구 사당동에 마련한 작업실이다. 여기서 시작과 독서에 전념했다. 서정주 시인이 붙여 준 그의 아호가 ‘이소’다.
시는 무엇을 추구했는가?
형식미,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했다.
그의 시론은?
첫째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을 통해 치열한 언어 미학을 구현하는 것, 둘째 세계와 자아의 대면을 통해 성찰적 내면을 탐구하는 것, 셋째 탈속과 정신적 상승 의지를 통해 통합적 구도 행위로 승화하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나?
<詩 짓기>, <리모콘>, <성냥>은 일상 사물의 속성을 전복적으로 재구성하는 절묘한 언어유희를 보여 준다. <木瓜나무>, <거미>, <고등어>, <넥타이>는 식물이나 곤충, 사물이 비상한 관찰력과 창조적 연상 작용을 통해 시제로 승화된 것이다.
일상 소재의 재발견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신에 대한 존재적 물음을 환기하는 성찰적 내면 탐구의 장을 마련한다.
구도 행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위에서 본 <孤島를 위하여>에서 잘 볼 수 있다. 정직하게 삶의 연륜을 갈무리한다. 자아와 세계를 융화해 한 걸음씩 구도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철듦의 시학이다.
철듦의 시학이란?
임영조는 초기 시부터 염결한 구도의 자세로 깨끗하게 나이 들어 가는 삶, 정직하게 시에 몰두하는 삶을 추구했다. 인생이 여물어 가는 시간의 흐름을 자연 만물의 순환 과정과 연결하면서 정직하게 ‘철들어 가는’ 시심(詩心)을 키웠다.
그에게 시인이란 무엇이었나?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 주는 모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언제부터 시 재능이 나타났나?
주산중학교 재학 시절, 지리 교사로 부임한 신동엽에게 ‘기억력 좋고 글 잘 쓰는 아이’로 주목받았다. 고등학교 때 ≪진달래≫, ≪한국 명시 전집≫, ≪한국 시인 전집≫을 독파하면서 시에 눈뜬다. 신동엽의 ‘무릎제자’가 되어 시 쓰기를 지도받았다.
본격 시작은?
1965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뒤 서정주, 박목월, 김구용, 김수영, 이형기, 함동선, 김동리, 손소희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다. 군 복무 후 대전 비래사에서 6개월간 시 쓰기에만 골몰하며 30여 편의 습작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등단은 언제였나?
1970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에 <出航>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木手의 노래>가 당선되었다.
이후 작품 활동은?
1985년에 발표한 ≪바람이 남긴 은어≫가 첫 시집이다. 이후 2003년 작고할 때까지 꾸준한 속도로 시 창작의 결실을 풍요롭게 일궈 냈다.
첫 시집 발표가 왜 이리 늦었나?
“직장생활에 쫓기고 발표 지면을 전혀 얻지 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설명했다.
문학사의 평가는?
“자아의 확립과 순리를 통한 삶의 이율배반성 극복”이라는 오세영의 평, “‘놀라운 통찰과 발견’의 형식을 구현하는 자기응시의 시”라는 조남현의 평이 있다. 1993년 제38회 현대문학상, 1994년 제9회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
평생 시를 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는 ‘진짜 좋은 시 한 편 얻기 위해 평생을 노심초사한 시인’으로 기억되길 염원했다. 그래서 “누가 불러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듯/ 나 홀로 떠나는 즐거운 유배!”를 자처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송아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