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한국 근현대시인 100선
지식을만드는지식 1000종 출간 기념 지식여행 Ⅶ : 초판본 근현대시인 100선
순결한 詩情
시어는 일상어와 다릅니다.
일상어가 이성의 도구적 기호라면
시어는 새로운 세계를 생성하는 목적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다른 표현으로 대체 불가능합니다.
시 네 편을 소개합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 민족시인 김소월, 항일 시인 윤동주,
그리고 북으로 간 시인 이용악.
모두 언어의 연금술사들이 애초 빚어낸 시어 그대로입니다.
직접 읽고, 순결한 시정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玩花衫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우름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 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이냥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초판본 조지훈 시선≫, 오형엽 엮음
대부분 조지훈의 대표작으로 <승무>를 추천하지만, 나는 이 시가 조지훈 시의 전체적 의미 구조를 함축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초판본의 의미는 시가 창작되고 발표된 당대의 시적 표현을 존중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문학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 오형엽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어!
虛空 中에 헤여진 이름이어!
불너도 主人 업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心中에 남아 잇는 말 한마듸는
내 마자 하지 못하엿구나.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西山마루에 걸니웟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러저 나가 안즌 山 우헤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눌과 사이가 넘우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여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초판본 김소월 시선≫, 이숭원 엮음
김소월의 시는 가장 많이 여러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그렇게 판본이 늘어날수록 원전 훼손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특히 김소월처럼 운율적 요소를 중시한 시인은 초판본 시집을 통해 소리와 의미의 결합 구조를 정확히 읽어 내는 일이 꼭 필요하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처절한 상실감과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을 호곡과 같은 어조로 표현한 작품이다. 통절한 슬픔과 회한이 펼쳐지지만 감정의 전개 과정은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시의 극한적 어사가 강한 열망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사랑의 대상을 잃은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오히려 독자들의 마음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 이숭원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쉽게 씨워진 詩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 疊 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 주신 學費 封套를 받어
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가?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 疊 房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초판본 윤동주 시선≫, 노승욱 엮음
초판본은 시인이 자신의 골방에서 일구어 낸 시 정신을 시대를 뛰어넘어 체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옛 국어 표기, 사투리 등의 표현을 그대로 접함으로써 윤동주 시의 오라(aura)에 좀 더 근접할 수 있다. 이 시는 윤동주 시의 특징인 부끄러움의 미학이 압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 후 수치심과 굴욕감에 괴로워하며 <참회록(懺悔錄)>을 썼던 시인이 일본 유학 생활 중에도 치열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부끄러움의 미학을 완성하고 있다.
– 노승욱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대우교수, 문학평론가
두 강물을 한 곬으로
물이 온다 바람을 몰고
세차게 흘러온 두 강물이
마주쳐 감싸 돌며 대하를 이루는 위대한 순간
찬연한 빛이 중천에 퍼지고
물보다 먼저 환호를 올리며
서로 껴안는 로동자 농민들 속에서
쳐녀와 총각도 무심결에 얼싸안았다
그것은 짧은 동안 그러나 처녀가
볼을 붉히며 한 걸음 물러섰을 땐—
사람들은 물을 따라 저만치 와아 달리고
저기 농사 집 빈 뜰악에 흩어졌다가
활짝 핀 배추꽃 이랑을 찾아
바쁘게 숨는 어린 닭 무리
물쿠는 더위도 몰아치는 눈보라도
공사의 속도를 늦추게는 못했거니
두 강물을 한 곬으로 흐르게 한
오늘의 감격을 무엇에 비기랴
무엇에 비기랴 어려운 고비마다
앞장에 나섰던 청년 돌격대
두 젊은이의 가슴에 오래 사무쳐
다는 말 못한 아름다운 사연을
쳐녀와 총각은 가지런히 앉아
흐르는 물에 발목을 담그고 그리고 듣는다
바람을 몰고 가는 거센 흐름이
자꾸만 자꾸만 귀틈하는 소리
“말해야지 오늘 같은 날에야
어서어서 말을 해야지…”
≪초판본 이용악 시선≫, 곽효환 엮음
일반 독자들은 이용악이 북을 택한 후 쓴 시편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 상에 시의 원문과 원형이 깨져서 돌아다니고 있어 원시를 훼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어느 것이 정본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초판본 시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문학평론가
기획위원에게 듣는다
이 기획의 의미는?
문학사적 성과를 중심으로 한 국내 초유의 체계적 시인 총서다. 한국 근현대시의 학문적 발전은 물론, 독자들이 우리 시와 더욱 친밀해지는 기회를 마련한다.
왜 초판본인가?
문학작품들은 현대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색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수준 있는 필자라도 원작 내용 그 자체를 온전하게 살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가능한 한 작품이 발표된 당시의 표기 형태를 그대로 살려 원작의 맛을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한다.
영인본과는 어떻게 다른가?
초판본에는 오류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이 기획은 이런 오류를 전문가적 관점에서 바로잡는다. 평론가들이 해독하기 어려운 글자를 확인한다. 원전에서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되는 글자는 수정한다. 읽기 어려운 한자, 현대에는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 사투리, 토속어, 북한식 표기 등은 주석을 달아 충분히 설명한다. 원전을 그대로 묶어 내는 영인본과는 달리 정확하고 미려한 현대적 시집으로 재탄생한다.
작가 선정의 기준은?
작고 시인 중심으로 선정했다. 생존 시인들은 아직 문학사적 평가가 더 남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기획위원들이 수차례의 회의를 통해 객관적 균형을 가질 수 있도록 엄선했다.
참여한 평론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해당 시인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권위자들이다. 대부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소속이거나 협회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한 학자들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기획위원의 한 사람인 이성천이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