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한하운 시선
한하운이 쓰고 고명철이 엮은 ≪초판본 한하운 시선≫
보리피리의 황금 선율
한센병은 하늘의 벌이라 인정이 없다.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편견의 종신형이다. 하운이 인간폐업을 마치고 감옥 문을 나설 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보리피리다. 자연의 축복, 생명의 노래가 시작된다.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둘리네
山도 언덕도 나무가지도
여기라 뜬세상
죽음에 主人이 없어 許諾이 없어
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둘리는가
매양 벌려 둔 저 바다인들
풍덩실 내 자무러지면
수많은 魚族들의 원망이 넘칠 것 같다
썩은 肉體 언저리에
네 헒과 菌과 悲와 哀와 愛를 엮어
뗏목처럼 蒼空으로 흘려 보고파진다
아아 구름 되고파
바람 되고파
어이없는 蒼空에
섬이 되고파
*어이: 하(何), 섬: 운(雲).
≪초판본 한하운 시선≫, <何雲>, 고명철 엮음, 69쪽
‘하운(何雲)’은 자기 이름 아닌가?
시인의 본명은 ‘태영’이고 ‘하운’은 호다. 나병이 호전되지 않고 갈수록 심해지자 ‘구름처럼 흩어져 떠도는 문둥이’라는 뜻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어이없는 蒼空에 섬이 되고파’를 부연하는 각주로 ‘하운’에 담긴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언제부터 나병을 앓았나?
바이런, 하이네, 릴케, 타고르, 워즈워스, 베를렌 등의 시를 읽으며 습작해 오던 시인은 이림농림학교 축산학과 재학 중이던 1936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나병 확진을 받는다. 18세 무렵이었다.
그의 삶에서 문학은 무엇을 했는가?
병이 악화되자 ‘하운’을 이름 삼아 문학에 정진한다. 나병이 목숨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문학은 그를 구원하는 마지막 힘이었다. 해방 직후 소련 군정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하자 혐의를 받아 구속되는 고초를 겪고 월남해 떠돌며 시를 써서 판 돈으로 근근이 생활했다. ‘나시인(癩詩人) 한하운 시초’라 해서 <전라도길>, <별>, <목숨> 등 시 13편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했다. 같은 해 5월, 첫 시집 ≪한하운 시초≫를 발간하면서 시작 활동을 이어 갔다.
병은 그의 시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나환자로 평생 ‘천형(天刑)’에 시달리며 살았던 그의 시 곳곳에는 고통과 울음이 배어 있다. ‘인간 폐업’이라는 시어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극단적인 자기 인식이 드러난다. 특히 <인골적>에서는 천형의 비장미와 숭고미가 느껴진다.
‘인골적’이 무엇인가?
“선남선녀의 부정 없는 생령을/ 생사람 산 채로 죽여 제물로/ 도색이 풍기는 뼈다귀를 골라 피리 감으로/ 다듬어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분다” <인골적> 한 대목이다. 몽고 나마승은 티 없이 순결한 선남선녀 육신을 제물로 바치고 추린 뼈로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피리 소리는 희생자들의 울음을 의미하나?
제물로 바쳐진 선남선녀의 “절통”이자 평생 문둥이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의 울음이다. 이 울음에는 처절한 고통이 배어 있다.
비장미와 숭고미가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시에는 또한 절대 순수를 마성으로 가둬 놓으려는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 있다.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해 신성(神聖)한 구원을 얻으려는 태도는 비장하지만 숭고하다. 한하운이 ‘문둥이 시인’으로서 도달하고자 했던 시적 욕망과 상통한다.
‘인간 폐업’을 끝내고 천형을 받아들이게 되는 전환점은 무엇이었나?
인간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천형이라면 그것을 초극해 비의적(秘儀的)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인간 폐업’이라는 자기 인식에서 나아가 문둥이를 어둠의 세계에 유폐하고 숙명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삶을 향한 에로스적 욕망이 드러난 시를 통해 문둥이들끼리 신생을 향해 가자는 생명의 길을 노래한다.
그러한 인식 전환이 ‘나해방’을 위한 사회활동으로 이어진 것인가?
죽음을 향해 가며 ‘피맺힌 통한’의 인골적을 불던 시인은 나환자 요양소 건립을 독려하는 한편 부정부패로 점철한 사회 불의에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이는 나환자들 목숨을 저당 잡고 상품화한 ‘나병 상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나환자들이 병리학적 존재가 아닌 사회, 역사적 주체로서 눈뜨는 것이 바로 시인이 바라던 ‘나해방’이었다.
나해방을 위한 한하운의 실천은 어떤 것이었나?
경기도 부평에 나환자 수용촌인 성계원을 건설하고 자치회장에 선출된 이후 나환자를 위한 사회봉사와 나병 퇴치 노력을 계속했다. 1954년에는 대한한센총연맹을 결성해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어쩌다 ‘문화 빨치산’이 되었는가?
1953년 ‘문화 빨치산’으로 몰리는 이른바 ‘나시인 사건’ 때문이다. 나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시인에 대한 질시와 무지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 1955년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를 출간했다.
‘나시인 사건’이란 무슨 일인가?
≪한하운 시초≫에 실린 <데모> 등이 불온한 사상을 담고 있다는 시비에 휘말렸다. <전라도길>에 나오는 ‘붉은 황톳길’ 같은 표현은 물론, 좌철 제본 형태까지 문제 삼아 한하운을 좌익으로 몰았다. 심지어 한하운이 가상 인물이라는 설까지 나돌았다. 국회에서도 이 일이 거론되자 직접 해명할 필요를 느낀 시인이 ≪서울신문≫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보리피리>를 써 본인이 한하운임을 증명했으나 의혹이 사라지지 않자 치안 당국에서 시인을 직접 조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당국의 발표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한국 현대 문단에서 한하운은 무엇인가?
한센인으로서 사회적 약소자의 상처를 시적으로 승화해 노래한 점, 그러면서 자신의 병을 개인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적 고통으로 심화·확산했다는 점은 유례가 없는 그의 독자성이다.
그는 어떻게 살다 갔나?
나병이 음성으로 판명되자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60년 한미제약회사를 창립해 회장으로 취임하고, 그해 7월 ‘무하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1964년, 나해방이라는 원대한 취지에서 월간 ≪새빛≫을 창간했다. 1971년에는 한국카톨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3년 소록도에 한하운 시비가 세워졌고, 간경화증으로 1975년 2월 28일 인천 자택에서 죽음을 맞았다.
당신은 누구인가?
고명철이다.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