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규 작품집
2490호 | 2015년 3월 13일 발행
생의 번득이는 순간, 그 이후
박연옥이 엮은 ≪최상규 작품집≫
생의 번득이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
실존은 언제나 불안하다.
그 자신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래서 순간에 몰입한다.
그러나 순간은 순간일 뿐, 지나면 그 자리에서 역사를 만난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어느 청명한 아침 그는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 흔히 개는 죽는다. 개가 죽었다면 그저 그러냐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개를 잡아 보신탕을 해 먹는다면 그저 그러냐고 하고 먹을 줄 아는 사람은 그거 한 그릇… 하고 침을 삼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개가 차바퀴 밑에서 역사(轢死)했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들은 갑자기 점성학자(占星學者)가 되고 원시철학자가 되는지 몰랐다. 비단 남들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그랬다.”
<사각(死角)>, ≪최상규 작품집≫, 최상규 지음, 박연옥 엮음, 29∼30쪽
어쩌다 개를 치었는가?
출근길에 새로 깐 아스팔트 길을 한참 달리고 있는다. 갑자기 길옆에서 누런 개 한마리가 달려나왔다. 고개를 뻔히 치켜든 채 바퀴 밑으로 굴러들었다.
‘그’는 누구인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가장이다. 복무 연한을 넘기고도 제대를 하지 않아 아내와 갈등했다. 그러나 제대하고 최근에 버스 드라이버로 취직했다.
이 사건은 그에게 무엇인가?
고개를 치켜들고 차바퀴를 향해 달려들던 개의 빠끔히 뜬 눈이 잊히질 않는다. 개의 눈빛에서 ‘생의 번득임’을 본다.
‘생의 번득임’이 무엇인가?
옛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로 하여금 제대를 결심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무슨 얘길 들었나?
친구는 한 전투에서 적군의 폭격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박격 포탄이 터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 절벽 아래 사각지대였다. 적군의 총알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곧 남겨진 전우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무작정 사각지대를 벗어나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그때 깨달음을 얻는다.
살아남은 뒤 뭘 깨달았나?
사각지대 안에서 위험이니 안전이니를 생각한 것은 쓸데없는 낭비였다. 사각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결정과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면 사각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뭔가?
실존의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우연으로 뛰어든 행동 때문이었다. 친구는 그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사각지대가 있었는가?
군대가 그의 사각지대였다. 그래서 뚜렷한 대비책 없이 섣불리 제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한평생 군대 생활만 할 작정이 아니라면 빨리 나와서 기반을 닦아야 한다고 채근했다. 그러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군’이라는 사각에서 탈출했다.
사각지대를 탈출하고 나서는 삶이 나아졌는가?
‘그’가 느끼는 불안은 여전했다. 한동안 아내가 벌어 온 돈으로 살았다. 아내의 불평불만이 커졌다. 버스 드라이버로 취직했다. 친구가 말한 번득임이 없이도 양순하고 알뜰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 시험해 보려 했다.
그러나 개의 눈에서 ‘번득임’을 보았으니 이제 어쩌는가?
자기기만적으로 운전수가 된 것을 반성한다. 아내와 타협하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이제는 자기기만이라는 존재 방식과 결별하려 한다.
최상규는 누구인가?
한국문학사의 사각(死角)에 놓인 작가다. 1956년 ≪문학예술≫에 단편 <포인트>와 <단면(斷面)>이 추천되어 데뷔했다. 단편 127편, 중편 15편, 장편 9편을 남긴 다작 작가지만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그는 어디 있었나?
1960년대에 유행한 실존주의 영향이 그의 소설에서는 당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심화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학사는 리얼리즘 문학론을 중심으로 민족·민중문학 연구에 치중했다. 그의 문학이 문학사 변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다.
어떤 실존주의였나?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언제나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 자신 말고는 다른 입법자가 없는 존재라는 존엄성을 부여했다. 최상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이러한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을 구현한다. 그는 초기 작품부터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의식을 보여 주었다.
문단의 평은?
동료 작가 강용준은 “지적인 작가요 스타일리스트”라 평가했다.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작가보다 문학 이론 번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34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과 재학 중에 데뷔해 1967년 <호오의 순유>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제럴드 프랭스, 웨인 부스, 시모어 채트먼 등의 문학 이론서를 번역했다. 1994년에 마지막 작품 ≪악령의 늪≫을 내놓고, 간경화가 악화되어 생을 마쳤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연옥이다.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