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베도 시선
2497호 | 2015년 3월 18일 발행
안영옥이 소개하는 인간의 다중성 또는 케베도의 시
안영옥이 옮긴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이 비예가스(Francisco de Quevedo y Villegas)의 ≪케베도 시선(Antología de la poesía de Quevedo)≫
변함없는 인간의 다중성
고상한 가치와 야비한 얼굴.
실재하는 인간의 두 모습이다.
심오한 철학자와 철면피 문학가.
케베도의 정체성이다.
바로크의 위기의식이 스페인 문학에서 가장 힘센 작가를 산출했다.
풍자시
쓴 진실을 입에서,
내뱉고 싶습니다.
쓸개즙이 영혼을 때린다 해도,
그것을 숨기는 일은 바보짓입니다.
고로 진리를 알기 바랍니다. 나의 태만에
자유를 낳았습니다.
가난입니다.
누가 애꾸눈을 미남자로 만들고
상식 없는 자를 진중한 자로 만들죠?
누가 탐욕스런 늙은이에게
요단 강이 되죠?
진짜 신이 아닌데도
돌로써 빵을 만드는 자는 누구죠?
돈입니다.
누가 홀(笏)과 왕관에게
맹렬하리만큼 무섭게 굴죠?
믿음도 부족한데 성자란
이름을 갖는 자는 누구죠?
하늘로 겸허히 머리를 드는 자는 누구죠?
가난입니다.
향유가 아닌데도 손에 바르면
마음이 부드러워져
뇌물을 좋아하는 재판관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죠?
철이 아니라 금으로써
폐색증을 고치는 자가 누구죠?
돈입니다.
≪케베도 시선≫,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이 비예가스 지음, 안영옥 옮김, 179~180쪽
케베도가 누군가?
17세기 스페인의 대표 시인이다. 본명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이 비예가스(Francisco de Quevedo y Villegas)다. 1580년 태어나 1645년 세상을 떴다.
17세기 스페인이란?
제국주의 이상이 좌절되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다. 사회는 부패하고 전염병, 기근으로 얼룩진 위기의 시대였다.
위기의 문학은 어떤 것인가?
르네상스기의 조화와 균형은 사라졌다. 불안정하고 불균형인 바로크 문학이 태어난다. 시에서 과식주의(過飾主義)와 기지주의(機智主義)가 유행했다.
시의 과식주의란?
일상어와는 먼 언어, 과한 장식으로 미를 창조하려는 시작 태도다. 복잡한 형식, 감각적 즐거움과 이미지를 추구한다. 귀족 문학이다. 공고라(Góngora)가 대표다.
기지주의는?
케베도가 창시한 시학이다. 개념의 강세와 집중을 위해 다의어와 대구, 암시를 주로 사용했다. 관계없는 사물과 어휘를 연계해 감각과 두뇌를 놀라게 하고, 터무니없는 과장, 지독할 정도의 말장난과 뒤틀림, 극한 대조를 통해 시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복잡하고 어렵게 간 이유가 뭔가?
케베도는 문학을 하나의 놀이로 보았다. 심오한 사상이나 고귀한 가치를 지녀야만 문학인 것은 아니다.
어떤 놀이인가?
패러디와 은유, 암시, 말장난이다. 스페인어가 자신의 표현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면 스스로 말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어떤 말을 만들었나?
그는 결혼을 ‘십자가의 길’, 즉 ‘칼바리오(calvario)’라고 표현했다. 그가 만든 말이다. 칼보(calvo)와 오사리오(osario)를 합친 말이다. 칼보는 대머리를 가리키는 단어다. 원래는 ‘아무 것도 나지 않는’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늙고 병든 남편을 뜻한다. 오사리오는 납골당을 부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비쩍 마른 부인을 뜻한다. 그는 이 두 낱말을 합친 말, 곧 십자가의 길이란 단어를 만든 뒤 이것을 사용해 결혼의 본질을 표현했다. 이 낱말들의 본래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곁의 의미와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케베도의 기발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해서 케베도는 뭘 이야기하려 했는가?
인간의 다중성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고상한 가치를 강력하게 긍정하고, 인간의 야비한 측면을 무자비하게 비난했다. 수수하고 엄한 문체로 심오한 사상을 응축되고도 강렬하게 표현하는가 하면, 순수한 정신적 사랑을 열정적으로 노래하다가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타락한 사회와 인간을 여지없이 뭉개 버리기도 한다.
극과 극의 한가운데 있는 것은 뭔가?
둘 다 케베도의 진짜 얼굴이다. 때로는 심오하고 엄숙한 철학자로서, 때로는 천박하고 철면피한 매춘 문학가로서 존재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고 이를 증언했다. 그가 스페인 문학에서 가장 강하고 힘있는 작가로 평가되는 이유다.
이 시집에는 어떤 작품을 실었나?
종교시와 연시, 풍자시를 고루 소개했다. 초기 시 11편에 ≪스페인의 파르나소스≫와 ≪카스티야의 마지막 3인의 뮤즈≫, ≪그리스도인 헤라클리토≫에서 선별한 시를 실었다. 테마와 표현 양식이 중복되는 일부 시는 제외했다.
이 작품의 번역 원칙은 어디에 두었나?
언어나 이미지, 사상을 일관성 있게 해석하려 노력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되, 우리말로 옮겼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자세히 주석을 달아 설명했다.
당신은 누군가?
안영옥이다. 고려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