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화전
늦었지만 고맙다. 지만지 국내 최초 출간 고전 4. ≪風姿花傳≫
예능의 길을 가리키다
서양인에게 동양의 연극은 곧 ‘노(能)’다. 아서 웨일리, 에즈라 파운드, 엘리자베트 하웁트만이 노를 번역했으며, 윌리엄 예이츠는 노의 대본을 썼다. 브레히트는 전래된 노를 개작 번안하여 상연했다. 한국에는 노가 소개되지 않았다. 너무 일본적이기도 하지만 이 유서 깊은 함축과 절제의 예술을 제대로 소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풍자화전>>은 서양 연극으로 보면 ≪시학≫과 다름없는 책이다. ‘노’의 구체적인 연기 지침을 통해 그것의 정신을 터득할 수 있다. 30여 년을 노 연구에 바친 김충영에게 ‘노’와 책에 대해 묻는다.
<<風姿花傳>>이 무슨 뜻인가?
‘풍자(風姿)’라는 말은 ‘예술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모습’이라는 뜻이고 , 화전(花傳)이란 “예술적 매력을 꽃피우기 위해 연기자가 알아야 할 비결을 써서 전한다’는뜻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무대 위에서 예술의 꽃을 피우기 위해 연기자에게 필요한 올바른 수련 태도를 제시하고 강조한다는 말이다.
가부키는 알아도 노는 모르겠다.
가부키와 흔히 비교되는데, 가부키가 주로 현실 세계를 그리는 데 반해 노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초현실적몽환(夢幻) 세계를그린다. 이것이 다르다.
뜻은 그렇다치고 공연 양식은 어떤가?
노는 가부키에 비해 그 표현이 지극히 상징적이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의 행동이 극도로 양식화(樣式化)되었고 그 결과 놀라운 절제미가 나타난다.
<<풍자화전>>이 그렇게 중요한가?
노(能)의 대성자 제아미(世阿彌)가 그의 실전적 경험을 이론서로서 정리하여 남긴 일본의 명저다. 이 저술은 그의 예술적 계통을 이어받을 후대들만을 위하여 타 극단에는 극비로 비전(秘傳)되었다. 1400년 대에 쓰인 책이 1908년에 와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노’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갖가지 조언을 담고 있다. 예술의 정점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전문 분야를 막론하고 읽어볼 만한 명저라 하겠다.
왜 아직까지 소개되지 않았을까?
국내에서의 번역 사례를 살펴보면 이미 오래 전에 한두 건 이 작품의 번역서가 나온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전공자의 번역이 아니어서인지 오역이 많고 문장이 난삽하여 번역서의 선례로 들기가 심히 민망할 정도이다.
민족 정서가 작용하진 않았을까?
일본문화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거부반응도 소개가 늦어진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지금 출간되었는가?
일본 전통 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실력의 척박함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왔다. 지만지 편집진의 야심찬 기획 의도에 크게 고무된 것이 이번 출간의 직접 계기가 되었다.
<<풍자화전>>의 한국어판 출간의 의미는?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 극 노(能)의 대표적 이론서다. 일본 문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극예술 관련의 종사자는 물론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진 우리 독자들의 시야를 넓고 깊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문: 노에서 수준 차를 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가리키는 말인지요?
답: 노에서의 예술적 수준 차는 예리한 안목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쉽사리 간파된다. 무릇 수준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계를 따라 순차적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이하게도 재능 있는 열 살쯤의 배우에게도 수준 높은 예풍(藝風)이 천부적으로 갖춰져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다만 부단한 수련 없이는 이 천부적 재능도 허사가 되고 만다.
우선 수련의 연륜이 쌓여 수준이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천부적인 수준이란 것은 ‘다케(長)’20)다. ‘가사(嵩)’21)라는 것은 별개의 개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개념을 같은 뜻으로 잘못 알고 있다. ‘가사’란 엄중하고도 기세가 있는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일체의 사물에 두루 미치는 예도(藝道)의 폭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수준을 나타내는 말로는 ‘구라이(位)’라는 말이 있는데, 이 ‘구라이’와 ‘다케’ 또한 서로 다른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천부적으로 유현(幽玄)한 데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구라이’다. 그러나 도무지 유현한 데가 없는 배우인데도 천부적 수준을 뜻하는 ‘다케’를 간직한 자도 있다. 이것은 유현하지 않은 ‘다케’다.
또한 초심자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초심자는 수련에 즈음해 ‘구라이’의 향상을 의식하면 절대로 그것을 이룰 수가 없다. 그렇게 의식하면, ‘구라이’의 향상은커녕 여태 쌓아 온 기예의 능력마저도 저하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라이’나 ‘다케’는 천부적인 것이어서, 타고나지 않고서 체득하는 것은 대개 어렵다 하겠다. 그러나 또한 수련의 연륜이 쌓여 예능상의 때가 씻겨 나간다면, 그 ‘구라이’라는 것이 저절로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련이라는 것은, 음곡(=우타이), 춤, 동작, 흉내 등 노 연기의 기초적 사항들을 철저히 공부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볼지어다. 유현한 수준(=구라이)은 천부적인 것인지, 또한 ‘다케’가 있는 수준은 수행의 연륜이 쌓인 결과 생기는 것인지를 깊이깊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본래는 높이나 길이를 뜻하는 말인데, 와카(和歌)나 렌가(連歌) 등에서 숭고한 품격미를 뜻하는 이념으로 중시되었던 것이 제아미(世阿彌) 시대에 와서 아름다움을 뜻하는 개념인 ‘유겐(幽玄)’과 대립적인 ‘강함’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2) 본래는 물체의 크기나 양을 뜻하는 말인데, 기세의 강도나 폭의 넓이 등의 뜻으로도 쓰였다.
<<풍자화전>>, 제아미 지음, 김충영 옮김, 6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