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토기 천줄읽기
일본 고대사 신간, ≪풍토기 천줄읽기≫
일본 땅에 살았던 모든 것
지금으로부터 일천삼백년전 제사십삼대 천황 겐메이는 일본 땅에 원래 있던 모든 것과 살아있는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모든 것을 적어 올리라 명한다. 713년과 925년에 일본의 삶에 대한 모든 지식이 수집되었으나 세월과 전쟁, 망각과 변심으로 말미암아 문자는 바래어 갔다. 그림자의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오늘 우리가 만나는 <<풍토기>>에는 여전히 일본의 뿌리와 정령이 살아있다. 세상에는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풍토기≫는 어떤 책인가?
기후와 지역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지방 지리서다.
풍토가 무슨 뜻인가?
일본 고대의 주석서 ≪영집해(令集解)≫는 이렇게 말한다. “사물을 양육하여 공(功)을 세우는 것을 풍(風)이라 하고, 앉아서 만물을 탄생시키는 것을 토(土)라 한다.”
바람이 사물을 키우나?
‘풍’은 풍습·풍속·교화라는 의미도 있다.
바람과 땅이 만나면 뭐가 되나?
풍토라는 말이 나타내는 자연은 인간성이 풍부하다. 인간의 성정이나 생활에서 취한 것이다. 따라서 풍토기란 단순한 지지(地誌)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생활지라 할 것이다.
내용은?
지리서이면서 풍속서이자 설화의 집합체다. 고대 일본의 사상과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일본 고대 기초 문헌은 어떤 것이 있나?
동시대의 문헌으로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만엽집(萬葉集)≫ 그리고 이 책이 있다.
편찬 시기는?
두 차례 편찬 시도가 있었다. 713년 5월 천황의 명으로 편찬했고, 925년 12월 공문서 다이조칸부(太政官符) 명에 따라 그간 수집한 내용을 진상하고 보완했다.
당시 상황은?
일본은 4세기에 왕인박사로부터 ≪논어≫와 ≪천자문≫을 전래받은 뒤 본격적으로 기록문학 시대에 접어든다. 그 뒤 600~700년에 걸쳐 정치개혁과 내란을 거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제에 의한 율령국가로 발전한다. 국사를 편찬하고 당으로부터 선진 문화를 익힌다.
≪풍토기≫의 편찬 목적은?
중앙집권 체제 강화다.
어떤 내용인가?
행정조직의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지방에 대해 강력한 지휘 명령권을 확보하려 했다.
누가 언제 편찬을 시작하나?
713년 5월 2일, 제43대 천황인 겐메이(元明) 여제가 명한다.
편찬자는?
실제 책임자는 나라 천도를 유도한 후지와라노후히토(藤原不比等)와 아와타노마히토(粟田眞人)로 추정된다.
당시 평가는?
편찬 명령을 실은 ≪속일본기≫ 기사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무시된 까닭은?
≪속일본기≫의 착란, 또는 그때까지 ≪풍토기≫가 공식적인 서명을 획득하지 못한 미완성작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최초 목적과는 달리 미완성인 채 지방 문서로 전락했다.
≪속일본기≫에는 편찬 명령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
“제국은 (1) 군·향의 이름에 호자(好字)를 붙이고, (2) 군내에서 산출되는 은동·채색·초목·금수·어충(魚虫) 등의 품목을 상세히 기록하고, (3) 토지의 비옥과 메마름, (4) 산천원야의 명칭 유래, (5) 옛 노인이 전하는 구문(舊聞)·이사(異事)를 사적에 실어 헌상하라!”
죽었던 책이 다시 살아난 사연은?
925년 후지와라노다다히라(藤原忠平)가 5기 7도 지방에 “급히 풍토기를 작성하여 헌상하라!”고 명한다.
무슨 말인가?
여러 지방에 있는 풍토기에 관련된 글을 지방청이나 군위 등에서 찾아내고, 찾지 못한다면 연장자에게 물어서라도 속히 헌상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풍토기≫가 완성되었나?
후지와라노다다히라의 명령을 수행한 절차나 완성된 여부는 알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책의 실존은?
713년 5월에 편찬 명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925년 12월의 명에 따라 ≪풍토기≫라는 이름으로 그간의 것들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212년 동안 소실이 진행되었고 1466∼1477년 오닌란(應仁亂)과 전국적인 내란으로 내용은 거의 소멸되었다.
원래의 분량은?
713년 당시 지역은 62개 지방, 3도(島)다. 한 지역당 한 권으로 셈해도 완성하면 60권이 넘는다.
현재 남은 것은?
히타치(常陸)·이즈모(出雲)·하리마(播磨)·분고(豊後)·히젠(肥前) 5개 지방의 것이다. 그중에서 ≪이즈모 지방 풍토기≫만이 완본이다. 다른 것은 생략본이거나 파손본이다.
지만지의 ≪풍토기≫는 어떤 원전을 옮긴 것인가?
≪風土記≫(吉野裕 譯, 平凡社, 1975)를 근간으로 고전문학대계의 ≪風土記≫(秋本吉郞 校注, 岩波書店 刊, 1958)를 기본으로 삼았다.
이 책의 내용은?
토속 관계 사항에 기초했다.
무엇이 등장하는가?
신·천황·사람 등 인물 중심으로 얽힌 설화들을 우선 발췌했다.
발췌 대상의 선정 이유는?
토속 관계 사항은 당시의 다른 문헌에는 전례가 없는 새로운 시도였다. 편찬을 맡은 관인에게는 개척자의 정열로 임해야 할 핵심적 조항이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 할 것이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하나?
1999년에 공역했으나 절판되었다.
1999년 번역본과 2012년 지만지 번역본의 차이는?
그때는 용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어지러운 여러 호칭을 하나로 통일해 ≪풍토기≫ 인물의 전체적 동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읽기 쉽게 주요 내용만 발췌했다.
달라진 점을 하나만 예로 들면?
가루시마의 아키라궁전에서 천하를 다스린 천황, 가루시마천황, 호무다천황, 가루시마의 호무다천황, 가루시마의 아키라궁전에서 천하를 다스린 호무다천황, 가루시마의 도요아키라궁에서 천하를 평정한 천황으로 썼던 인물을 이번에는 “15대 오진(應神)천황”이라고 통일했다.
번역의 난점은 무엇이었나?
용어 통일이다. 외래어표기법을 따라 지명을 쓸 때 일본어의 어감이 살지 않아 특히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일러두기에 밝히고 예외를 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오오하마(大濱)·오하마(小濱)처럼 大와 小를 분명하게 나눠야 할 때는 장음을 그대로 살렸다.
일본 연구에서 이 책의 역할은?
일본 문학이나 어학을 공부하려면 그 주변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문학이나 어학을 만들어 낸 주체의 생활 기반이 그 시대의 역사, 정치, 지리 등의 제반 사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문학, 문화, 어학을 연구할 경우에는 그 관계가 더욱 깊어 주변 학문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참된 연구가 나오기 힘들다. ≪풍토기≫는 그러한 일본 연구의 기본 도서다.
한국 사람이 고대 일본의 사정을 왜 알아야 할까?
책을 보면 신라, 백제 등 한국 관련 사항이 산적해 있다. 일본에 건너간 우리 선조의 발자취가 일본 풍토의 곳곳에 남아 있다.
한일 양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풍토기≫는 한일 고대사와 문화 연구의 기초 자료다. 한일 양국의 고대 관계사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더 깊은 연구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강용자다. 일본 국학원(國學院)대학에서 일본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엽집≫을 텍스트로 한일 간 고대 문화의 관계를 복원하고 싶다.
≪풍토기≫를 맛보고 싶다.
이 대목을 읽어 보라. 후지산에 왜 눈이 사라지지 않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이 말하는 바이다. “옛날 조상님의 어머니 신이 자식 신들이 있는 곳으로 행차하시다가 스루가지방 후지산에 도착하니 마침 해가 저물어버렸다. 그래서 하루 묵을 숙소를 찾았다.” 이때, 후지신이 “지금은 와세노니나메(新嘗祭: 가을에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고 왕 스스로도 이를 먹는 것)인지라 집안의 모든 자가 타인과의 접촉을 끊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묵으실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조상신은 “나는 너의 조상인데 어째서 묵게 하지 않는 것이냐. 앞으로 네가 사는 산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영원히 눈이 내리고 서리가 껴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해 음식물을 산신에게 바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저주했다. 그리고는 뒤이어 츠쿠하언덕으로 올라가 묵을 곳을 찾았다. 그러자 츠쿠하신은 “오늘 밤은 신에게 제사 지내는 날이나 어찌 당신 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고는 공손히 예를 갖춰 음식물을 준비해서 받드니 조상신이 기뻐 노래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자손 츠쿠하신이여! 신의 궁전은 훌륭하며 높고 크고 천지, 일월과 같이 영구히 변하지 않아 사람들은 신산에 올라 축수하게 되며 신에 대한 풍성한 공물도 언제까지나 계속되고, 하루하루 번영을 더해 천년만년 뒤에까지도 신산에서 즐겨 노는 것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후지산에는 언제나 눈이 내려 사람들이 올라갈 수가 없는 데 반해 츠쿠하산에서는 서로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마시고 노는 일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이질 않는다.
≪풍토기≫, 지은이 미상, 강용자 옮김, 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