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하근찬 작품집
2550호 | 2015년 4월 21일 발행
한국 현대에서 아버지와 아들
이상숙이 엮은 ≪초판본 하근찬 작품집≫
한국 현대에서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에게 일제 강점기가 있고
아들에게 한국 전쟁이 있다.
민족과 계급의 충돌은 가족을 파괴한다.
아버지는 팔을 잃고
아들은 다리를 잃는다.
둘은 서로의 팔과 다리가 될 수 있는가?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하였다. 외나무다리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며 만도는 속으로
‘인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타고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줏어섬겼고, 아부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하고 중얼거렸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가는 것이었다.
<수난 이대>, ≪초판본 하근찬 작품집≫, 하근찬 지음, 이상숙 엮음, 43∼44쪽
아버지가 왜 다 큰 아들을 업고 가는가?
외나무다리다. 진수는 한쪽 다리가 없다. 지팡이를 짚고 찌긋둥찌긋둥 걷는다. 시냇물은 모래흙이라 다리 아래로 건너기도 만만치 않다.
진수 신세가 어쩌다 ‘똥’이 되었나?
한국 전쟁 때문이다. 진수의 설명이다. “전쟁하다가 이래 안 댓심니교, 수루탄 쬬가리에 맞았심더. 얼른 낫지 않고 막 썩어 들어가기 땜에, 군의관이 짤라버립띠더, 병원에서예.”
아버지가 ‘더럽게’ 복이 없는 이유는?
만도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에 끌려갔다. 비행장 닦는 노역을 하던 중 폭격을 맞아 한쪽 팔을 잃었다.
부자 이대의 불구는 무엇을 가리키나?
우리 현대사의 비극, 그리고 극복과 희망의 주체 역시 그들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그들의 운명에 공감하고 먹은 마음의 단단함에 위로받고 공감한다.
이 소설이 수작인 이유는 무엇인가?
대비나 상징 같은 소설적 형식이 뛰어나다. 형식과 조응하는 안정되고 유려한 문장을 갖추었다. 수난의 역사가 인간을 통해, 또 인간이 수난의 역사를 통해 서로 해석되고 드러난다.
하근찬은 어떤 소설가인가?
해방(解放)과 전후(戰後)를 그린 소설을 이어 발표했다.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민족 수난사를 그린다.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세대 구조를 활용했다.
세대 구조는 작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흰 종이수염>에서는 징용에서 한쪽 팔을 잃고 돌아온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놀려 대는 친구들과 싸우는 아들이 등장한다. <왕릉과 주둔군>에는 왕릉을 지키는 아버지와 주둔군을 따라 가출해 혼혈 아이를 낳아 돌아온 딸이 등장한다. <나룻배 이야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징집되는 젊은이들과 이에 반감을 드러내는 배꾼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세대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역사적 현실의 중압감과 개인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다.
성공했나?
등단작 <수난 이대>는 그렇다. 하지만 반복해 사용함으로써 문제를 드러낸다.
어떤 문제인가?
이후 작품에서 <수난 이대>와 같은 비장함이 사라진다. 해방과 전쟁이 지나가자 한국 사회에서는 거대 담론의 압박이 사라진다. 작가가 세대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시대의 변화 속에 위협받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우려와 소회를 넘어서지 못한다.
한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나룻배 이야기>의 삼바우는 징집영장을 전하는 관리들을 태우지 않고 뱃머리를 돌린다. 이때 “술이 깨는 듯 오스스 떨리어” 오는 것을 느낀다.
오스스 떨리는 이유는 뭔가?
한기다. 비극을 멈추는 근원적인 저항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공포와 좌절의 한기일 뿐이다.
작가는 어떻게 살다 갔나?
193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 이대>가 당선된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여제자> 역시 그의 작품이다. 2007년 11월 타계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상숙이다. 가천대학교 글로벌교양대학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