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린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의 <<하멜린Hamelin>>
아이들은 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갔을까?
호세마리는 199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아동 성추행 및 음란물 제작 사건’의 피해자를 대변한다. 자선을 가장해 욕망을 채워 온 부자 리바스, 알고도 모른 척 자식을 방치한 부모 파코와 펠리, 직업적으로만 아이를 대하는 심리상담사 라켈, 사회정의를 위한다지만 자기 자식한테는 무관심한 판사 몬테로, 진실 보도를 말하면서 자극적 기사만 쏟는 언론, 아이들은 쥐떼가 되어 피리소리를 따라간다.
해설자 “하멜린”*, 제15장. 호세마리의 생일, 보호소 학교 면회실. 어머니와 형제들이 호세마리를 기다리고 있다. 라켈의 손에 이끌려 호세마리가 들어온다. 펠리가 첫 번째로 호세마리에게 입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은 그다음에 한다. 입구에 서 있던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마지막으로 호세마리에게 입을 맞춘다. 호세마리는 펠리의 눈을 보지 않는다.
펠리 여기, 내 옆에 앉아. 똑바로 앉아.
해설자 몬테로와 라켈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이들이 만나는 광경을 지켜본다. 면회실에 들어가기 전에 라켈은 호세마리에게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라켈 무서워하지 마. 네가 불편하면 언제든 나한테 신호해. 그러면 우리는 네 방으로 돌아가는 거야.
펠리 여기서 뭐하는지 이야기해 봐. 자, 아침에는 뭐하니?
해설자 호세마리가 이야기를 해 준다. 수업하고 축구.
펠리 그럼 오후에는?
해설자 호세마리가 오후에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펠리 먹는 건 어때?
호세마리 좋아요.
펠리 우리한테 더 이야기해 줄 거 없어? 우리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곤살로가 일하게 된 거 아니? 곤살로, 얘기해 줘.
해설자 곤살로는 확실한 일이 아니라, 시내 바에서 한 달간 실습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펠리 집에서 뭐 좀 가져다줄까?
호세마리 아빠는 어디 있어요?
해설자 파코는 밖에 트럭에 있다. 트럭은 빌려 온 것이다.
펠리 아빠한테도 일자리가 생겼어. 그래서 오실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뭐가 필요한 거지? 옷? 돈?
호세마리 외출할 때 돈을 줘요.
펠리 외출해도 되니?
호세마리 담당 선생님이랑요.
해설자 라켈 쪽을 바라본다. 라켈은 이야기하듯, 자기 시계를 가리킨다.
라켈 마무리해야겠네요.
해설자 라켈은 나갔다가 케이크를 들고 돌아온다.
라켈 호세마리가 골랐어요. 자, 호세마리, 소원 한 가지 생각해 봐.
해설자 호세마리는 한 번에 촛불을 끈다. 가족들은 선물을 꺼낸다. 펠리는 셔츠를 선물한다. 곤살로는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펠리 그리고 이건, 아빠가 주시는 거야. 널 많이 사랑하신대.
해설자 물감 상자다. 몬테로와 라켈이 입구까지 배웅한다. 그리고 면회실로 돌아가 호세마리가 선물을 챙기도록 도와준다.
호세마리 왜 아빠가 안 왔죠?
해설자 이틀 전에 심리상담사가 판사에게 다음과 같은 소견서를 보냈다.
라켈 우리가 환자를 알게 됐을 때 환자는 자율적인 인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면에 부정적인 자아가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우리는 환자에게 개입해 환자 스스로 택한 사물들을 통해 자율성이 확장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환자의 불신으로 우리의 전략은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어른들의 애정 표시에 대해 폭력적인 행동으로 대응합니다. 이런 폭력성은 환자처럼 붕괴된 가족에 속해 있는 미성년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환자는 자신에 대해, 특히,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해 모호하게 표현합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환자가 기관에 들어오도록 진행된 일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혼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자는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 아버지에게 해를 끼쳤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환자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고, 그 고통을 어른 전체에 투사해 치료에 방해가 됩니다. 따라서 환자가 생물학적 아버지와 다시 만나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장점이 해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보다 크다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환자의 안정된 감정 상태를 방해하는 전화나 편지를 연결하지 말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호세마리 왜 아빠가 안 왔죠?
해설자 침묵. 몬테로는 호세마리에게 전에 앉았던 곳에 앉으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곁에 펠리가 아니라 라켈이 있다. 질문은 판사가 한다. 라켈은, 말하자면, 통역사다. 라켈은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안다.
라켈 기억나니, 리바스 아저씨랑 네가 했던 것을 판사 아저씨한테 이야기한 거? 맞아, 너희는 리바스 아저씨를 파블리토라고 부르지. 네가 얘기 안 한 게 아빠한테는 어땠을까.
해설자 침묵. 이 침묵을 알아듣기란 어렵다. 아이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겁먹지 않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라켈 네가 파블로와 가는 걸 아빠는 좋아하셨니?
해설자 침묵. 라켈은 호세마리에게 다가간다. 거의 귀에 대고 이야기한다.
라켈 무서워하지 마.
해설자 침묵.
호세마리 며칠 파블로를 안 만나면, 나한테 말했어요. “자, 파블로한테 전화해라.”
라켈 파블로 만나라고 시켜?
호세마리 가끔 나는 싫어요. 하지만 아빠가 말해요. “파블로 만나. 우리한테 아주 잘해 주잖아.”
라켈 그럼 넌 파블로랑 억지로 만난 거네.
호세마리 내가 전화하지 않으면, 아빠가 전화번호를 눌러요.
라켈 파블로가 아빠한테 돈 주는 거 아니?
호세마리 구두쇠예요. 나한테 200짜리 자전거 사 준다고 약속해 놓고 80짜리 사 줬어요.
라켈 네 앞에서 돈을 주니?
호세마리 몰라요.
라켈 네가 파블로랑 나가고 파블로는 아빠한테 돈을 주고, 그런 거니?
호세마리 몰라요.
라켈 네가 파블로랑 같이 시간을 보내니까 아빠한테 돈을 주는 거니?
호세마리 아빠는 파블로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요. 만약에 알았으면, 못 가게 했을 거예요.
해설자 침묵.
라켈 호세마리, 사실을 말하는 걸 무서워하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판사 아저씨랑 내가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호세마리 아빠는 파블로가 원하는 걸 몰라요. 만약 알면, 파블로를 죽일 거예요.
해설자 침묵.
몬테로 자,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라. 골 많이 넣어.
해설자 침묵.
라켈 자기 아빠를 보호하려고 해요. 아니면 아빠가 무섭거나, 자신을 속이고 있어요. 어쩌면 이 모든 게 한꺼번에 조금씩 섞여 있어요. 그림 보셨어요? 거기 모든 게 있어요.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게 뭔지 몰라요, 엄마도. 어떻게 판사님은 그 엄마를 계속 믿으시죠? 아직도 엄마가 몰랐다고 생각하세요? 모를 수 있을까요? 알았어요. 하지만 다른 쪽을 바라봤던 거죠. 모두가 알았어요. 하지만 모두가 부인하겠죠. 그게 침묵의 법칙이에요. 수치심이 그들을 침묵하게 하죠. 하지만 아직 그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엄마, 그 아빠랑 같이요. 호세마리가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보세요. 그 아이들은 안정감이 없어요. 여기서 안정감을 가지게 될 거예요.
해설자 한편, 호세마리는 자기 방으로 간다. 침대 위에 누워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읽는다. 곤살로가 처음으로 그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7쪽에서 호세마리는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져 있는 편지를 발견할 것이다. 편지는 대문자로 쓰여 있다.
리바스 사랑하는 호세마리, 책 마음에 드니? 네가 나한테 못되게 굴어서 생일 요정이 이번에는 너한테 아무것도 주고 싶어 하지 않았어. 요정이 나한테 말했어. “호세마리는 잊어.” 하지만 내가 요정한테 말했지. 너를 잊을 수 없다고. 비록 너한테 화는 많이 났어도 말이야. 화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지. 난 아직도 아파. 네가 말했다는 모든 것을 판사가 나한테 이야기해 주는데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너와 나 사이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넌 알잖아. 나한테 달라붙은 건 너였어. 내가 냉정을 찾으려고 하거나 곤살로에게 돌아갈 때면 네가 나한테 전화를 했지. “파블로, 나를 찾아오지 않은 지 오래됐네요. 나한테 화난 거예요?” 네가 나한테 말했잖아, 내가 보고 싶다고. 그래서 난, 이 모든 걸 네가 이야기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네가 말했다면, 네 말이 아니지, 너를 혼란스럽게 한 거지. 너를 혼란스럽게 하도록 놔두지 마. 우리는 부끄러워할 게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마. 그 사람들은 마음이 병들었어. 우리가 언제 다시 볼지 난 모르겠다. 숙제하고 있니? 공부 열심히 해, 내가 너를 자랑스러워하게 말이야. 뭐 필요한 거 있으면 곤살로한테 말해. 너를 보러 더 많이 갈 거야. 나한테 뭐 보내고 싶으면, 그것도 곤살로한테 줘. 내가 뭘 원하는지 아니? 네가 그린 그림들 중에 하나를 보내 줘.
해설자 호세마리는 편지를 뒤집고 그림을 그린다. 말? 아니면 쥐? 쥐처럼 보인다. 그다음 다른 쥐, 또 다른 쥐, 백만 마리의 쥐.
* 하멜린: ‘피리 부는 사나이’ 전설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독일의 하멜른(Hameln)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스페인식으로 ‘하멜린(Hamelin)’으로 표기하고 있다.
<<하멜린>>, 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75~82쪽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 1965~)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 극작가.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5년간 마드리드와 근교의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현재는 마드리드 왕립 드라마예술학교 교수다. 연극은 즐거움과 감동 외에도 관객들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뭔가를 던져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철학은 연극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대한 작가들은 사고에 몸을 입혀 추상을 구체로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선한 칠인(Siete hombres buenos)>(1989),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Cartas de amor a Stalin)>(1999), <뚱뚱이와 홀쭉이(El Gordo y el Flaco)>(2000), <천국으로 가는 길(Himmelweg, Camino del cielo)>(2003), <끝 줄 소년(El chico de la ú́ltima fila)>(2006), <다윈의 거북이(La tortuga de Darwin)>(2008) 를 썼다.
김재선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스페인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한다. 스페인 연극에 대해 다양한 논문을 쓴다.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La tortuga de Darwin)≫(2009), ≪영원한 평화(La paz perpetua)≫(2011)를 번역해 지식을만드는지식을 통해 소개했다.